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제 역사가 아닌 신학적인 역사이다. 따라서 사실의 검증보다는 신학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예언자 또한 단어 그대로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예언자들의 삶은 편안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위기와 타락의 시기마다 예언자가 등장하기에, 등장해서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고 회개를 촉구하기에, 그 역할과 소명의 성격상 편한 삶을 살 수가 없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인들을 모두 예언자라고 한다면, 또는 신앙인들이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다수의 예언자 시대, 내지는 예언자 평등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도 세상은 왜 이렇게 혼란스러울까, 그것은 아마도 영혼이 살아있는 개인이 그만큼 적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긋지긋하게 말을 안 듣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상은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간극이 거의 없다. 세상에는 하느님보다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다다익선의 미덕이며, 가족애는 인간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이기주의의 함정이다. 더욱이 점점 관계가 파편화되는 오늘날 자식 앞에 정의 없다. 우리 사회 부조리의 대부분이 가족주의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함세웅 신부와 주진우 기자가 함께 전국의 50여 개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했던 현대사 콘서트 내용을 엮어 공저로 『악마 기자 정의 사제』(시사IN북, 2016.)를 출간했다. 주진우는 김용민 브리핑(팟빵, 10. 9.)에서 함세웅 신부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은 우리 현대사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시대를 지켜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서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어두운 시대에도 그에 저항하며 미래를 열어온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과거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언자는 자기 민족의 역사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게 하고, 민족의 정체성에 기여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듯이, 나의 뿌리를 부정하는 민족이 글로벌 마인드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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