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은 예언서다?
요한 묵시록의 표현들이 오늘날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낯설고, 요한 묵시록을 이루는 이야기의 전체 구조가 하나의 일관된 형식이 아니라, 환시문학과 서간문학, 지혜서와 예언서의 양식이 모두 결합되어 있다 보니, 여전히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를 자처하는 특정인들에게 해석을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오직 “어린 양”만이 “봉인”을 풀어 “두루마리”를 펼 수 있다고 하니, 겸손하거나 권위에 순종적인 신앙인들은 묵시록을 스스로 읽지 못하는 텍스트로 생각해 왔다. 이러한 풍토는 ‘합당한 자’의 해석을 비판 없이 수용해야 하는 토대가 되었고, 묵시록을 둘러싼 해석상의 이견을 공론화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자연스럽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의 연장선에서 오늘날 묵시록에 미혹되는 신앙인들이 많은 것이 종교계의 현실이다.
그런데 종교사적인 사건들은 무엇보다 신화적인 내용으로 묘사된 요한 묵시록 12, 13장에서 발견된다. 아이의 출생(12,1-6)에 관한 형상들의 배후에는 두 가지 신화, 즉 태양신의 출생과 박해, 승리에 관한 신화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혼돈의 주체인 용의 출현과 멸망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리고 13장의 신화적인 모형은 두 짐승이 레비아탄과 브헤못(다니 7장, 욥기 40장)의 형상을 빌려온 데서 드러난다. 이러한 신화적인 모습들은 전적으로 시간사와 관련되지 않고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종교사적 해석을 통해 보완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당시의 독자들에게 저자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이미 비평가들이 말한 것처럼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사변들을 위한 하나의 수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사된 희망의 빛에서 종말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 안에서 교회의 책임을 인식하도록 교회를 돕는다.1 이는 특히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런 서간문 형태가 바오로 서간들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존의 유다교 묵시문학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묵시문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묵시문학’이란 용어는 그동안 모호하게 규정돼 왔다. 그래서 코흐는 이미 문학 형태로서의 “묵시록”(apocalypse)과 역사적 운동으로서의 “묵시문학”(apocalyptic)을 구분하였다. 더욱이 최근 학계에서는 문학 유형(literary genre)으로서의 묵시록(apocalypse)과 사회 이념(social ideology)으로서의 묵시주의(apocalypticism), 그리고 다른 문학 유형들과 사회적 작품들에서도 발견되는 일련의 사고와 모티브로서의 묵시문학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 ology)을 구별한다.2 이런 세분화 작업은 묵시문학을 연구하는 데 보다 선명한 방향성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텍스트 간의 분명한 경계가 합의되지 않았으며, 특정한 구성요소가 전체를 대표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류 또한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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