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은 그가 예언자로서 하느님이 주신 소명을 다하고자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악하며, 열강들 사이에서 민족의 정체성이 와해되는 상황 역시 오늘날에도 진행 중인 역사적 실체이다. 그로 인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그들의 고통을 대속해야 하는 선지자들의 고통은 욥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고통받는 당사자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고통받는 사람의 범주를 넘어선 연대 책임의 문제로 특히 그 시대의 선각자들에게서는 피해갈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대가 불행한데도, 가난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데도, 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면 자기 자신을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고통은 분명 불행의 원인이다. 사디스트가 아닌 이상 고통이 기쁨이라고 하는 주장은 기이한 일이다. 따라서 고통이 자기 성숙에 기여했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고통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것대로 고통을 우상화하기에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 문제는 인간이 구비구비 어리석은 존재라는 데 있다. 대다수의 인간은 육이 풍요롭고 만족한 상태에서는 영이 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질적인 부자들에게서 미숙한 영혼을 발견하기 쉽다. 물론 이런 일반화는 매우 위험한 사고이지만,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도 성숙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존재 자체로 참으로 축복받은 생명일 것이다. 그러나 비가 온 뒤에야 비로소 땅이 굳는다고, 고통은 성장의 필연이며 상처는 성장통의 흔적인 것만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비를 피하지 않고 스스로 흠뻑 맞는 것도 고통을 대하는 좋은 자세일 수 있다. 이미 비에 젖은 사람은 더 이상 비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덧붙여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함으로써 더 많이 아파하고 상처받으며 더 크게 성장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유사한 처지에서도 고통의 강도가 사람마다 다른 것은 각자의 경험치가 다르고 트라우마가 다르고 내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위로 삼아, 하느님은 그 사람이 견딜 만한 정도의 고통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전적으로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정면으로 껴안되 고통받는 이웃들 옆에서 고통을 나눠질 수 있는 마음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고통은 연대의 초석이 될 수 있다. 세상이 정의롭고 공정하면 기쁨도 연대의 동력이 될 수 있겠지만,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선 고통만이 연대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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