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인간

성전창녀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

아난존 2017. 12. 11. 12:48


1. 삼손을 죽인 들릴라


판관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인 삼손은 이방인 여성 들릴라의 계략에 빠져 죽음을 당한다. 그래서 들릴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을 배신한 사악한 여인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이철호는 자신의 논문 <나지르인 대 성전 창녀>에서 그녀가 종교적인 통과의례를 거치고 있었던 신성한 창녀”(a sacred harlot)였을 가능성을 제기한 밀턴의 주장에 주목한다. 만약 이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처럼 들릴라도 삼손이 하느님을 배신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남편을 배신했으니까 죄가 없다고 막연하게 주장하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국적과 종교를 따르는 것의 윤리적인 시비를 굳이 따질 필요도 없어진다고 강조한다. 왜냐면 나지르인’(a Nazarite) 삼손이 민족의 해방을 위해 결혼을 이용한 것처럼, 성창 들릴라가 결혼이란 굴레보다 종교적 의무를 더 중시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들릴라와 들릴라가 속한 필리스티아인(블레셋인)의 종교는 무엇이었나?

판관기 1623절에 보면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자기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물을 바치면서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들릴라가 속한 필리스티아인들은 다곤 신을 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다곤 신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여 삼손을 들릴라의 계략으로 사로잡은 후 우리의 원수 삼손을 우리의 신께서 우리 손에 넘겨주셨네.”(판관 16,23)라며 다곤 신을 찬양한다. 이처럼 삼손의 신 야훼와 들릴라의 신 다곤이 충돌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야훼에게 돌아간다.


그때에 그 집은 남자와 여자로 가득 찼는데, 필리스티아 제후들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 옥상에도 삼손이 재주를 부릴 때에 구경하던 남자와 여자가 삼천 명쯤 있었다. 그때에 삼손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주 하느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저에게 다시 힘을 주십시오. 하느님, 이 한 번으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저의 두 눈에 대한 복수를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삼손은 그 집을 버티고 있는 중앙의 두 기둥을 더듬어 찾아서, 기둥 하나에는 오른손을, 다른 하나에는 왼손을 대었다. 그리고 삼손이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죽게 해 주십시오.” 하면서 힘을 다하여 밀어내니, 그 집이 그 안에 있는 제후들과 온 백성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사는 동안에 죽인 사람보다 더 많았다(판관 16,27-30).

 

삼손은 죽으면서 마지막 남은 힘을 사용하여 그가 사는 동안에 죽인 사람보다 더 많은 필리스티아인들을 죽였다. 그런데 이때 사용한 힘은 삼손의 기도를 들어주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힘이지, 삼손 개인의 힘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삼손과 이스라엘의 신이 들릴라와 필리스타인들의 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곤 신에 대한 적대감과 야훼 신의 월등한 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은 사무엘기 상권 5장에서도 진술돼 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궤를 빼앗아 에벤 에제르에서 아스돗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에 필리스티아인들은 하느님의 궤를 들어,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다가 다곤 곁에 세워 두었다. 이튿날 아스돗인들이 일찍 일어나 보니,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다곤을 일으켜 제자리에 다시 세웠다. 그들이 다음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다곤이 또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다.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을 뿐, 머리와 두 손이 잘려서 문지방 위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아스돗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다곤의 사제들과 다곤의 신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모두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1-5).

 

하느님의 궤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곤은 머리와 두 손이 잘려서 문지방 위에 널려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야훼 신의 힘은 다곤 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다곤 신이 사무엘기를 거쳐 마카베오기에서도 나타난다.

 

기병대도 평야에 뿔뿔이 흩어져, 목숨을 구하려고 아스돗으로 달아나 저희 신전인 벳 다곤으로 들어갔다. 요나탄은 아스돗과 그 주변 성읍들을 불태우고 거기에서 전리품을 거둔 다음, 다곤 신전과 그곳으로 피신한 자들을 불로 태워 버렸다(10,83-84).

 

물론 마카베오기에서는 신과 신의 대결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야훼 신의 우월함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곤 신전의 흔적을 통해 다곤 신의 존재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유대인들이 야훼 유일신 사상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나안 땅의 신들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나안 종교의 의례나 관습은 더욱 혐오스러운 것으로 폄하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유일신 야훼는 가나안의 그 어떤 신과도 공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나안 종교와 혼합된 셈계의 신 다곤은 가나안 지역의 토착민들이 전통적으로 숭배한 바알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대 농경사회의 다산과 풍요는 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더욱이 강우량이 확실치 않은 가나안 지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비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흙과 합쳐지면 놀랍고 신비한 요소로 작용하여 생명을 공급하는 각종 과실과 곡식들을 맺게 한다고 믿었다. 또 그들은 비가 내리는 이유를 남신들과 여신들이 성적(性的)으로 결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뭄이나 기근이 들면 신들을 자극하여 성적 결합을 하도록 유도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신공양을 행한 바알 신 제사장들이 피와 물()의 유사성에 착안한 공감주술로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렸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기우제 성격을 띤 이런 성적 의식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면 모든 창조물이 사멸하게 된다고 굳게 확신했다. 요컨대, 바알과 그 이전의 다곤을 신으로 숭배하는 곳에서는 신성한 종교적 매춘행위가 성행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성행위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 내지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행위에서 윤리적 기준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릴라가 성전 창녀였다면 자신의 민족을 위해 삼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이때 들릴라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아내의 덕성이 아니라 전사의 덕성이기 때문이다. 비록 삼손이 들릴라의 매력에 빠진 상태라고는 하나 들릴라 역시 목숨을 건 행동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판관기 165절이다.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그 여자에게 올라가서 말하였다. “삼손을 구슬러 그의 그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잡아 묶어서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어라. 그러면 우리가 저마다 너에게 은 천백 세켈씩 주겠다.”

 

이처럼 들릴라는 필리스티아 제후들을 직접 상대하는 여성이다. 더욱이 그녀는 계속된 실패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성공에 대해서만 막대한 상금을 받는다. 이는 그녀의 신분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므로 들릴라가 성전 창녀였다면 상당히 높은 지위, 즉 여사제 정도의 위치였을 가능성을 함축한다.


2. 근절되지 않는 바알 숭배

 

바알 숭배에 대해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단호하게 경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끈질기게 지속된다.

먼저 탈출기에서 경고가 시작되는데, 이는 이제 곧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하므로 가나안 종교들과의 충돌이 예측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해서도 그 신들을 섬겨서도 안 되고, 그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기념 기둥들을 부수고 깨뜨려 버려야 한다(탈출 23,24-25).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을 전부 멸종시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선언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란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뒤따라 나오는 구절인 가나안의 신들에게 경배하지 말라에서 그 근거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이 멸종된다면 당연히 그들의 신도 같이 멸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살고 있던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한 뒤에도 여전히 생존해 있을 것이기에 가나안의 신들 역시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방신들에 대한 경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주님께서 바알 프오르에서 하신 일을 두 눈으로 보았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프오르의 바알 신을 따라간 사람들을 너희 가운데에서 모두 멸망시키셨다(신명 4,3).

 

이처럼 이방신 숭배에 대한 결과는 가혹한 것이었다. 또한 우상 숭배에 대해서는 그 처벌에 전혀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는 근절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판관 2,11-13).

 

판관기에서 다시 반복되는 바알과 아스타롯 숭배에 대한 질책은 여전히 이방신 숭배가 근절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는 예레미야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예레미야 2,8).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를 근절하지 못하고 바빌론 포로기를 거치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빌론이란 우상 숭배로 인해 맞이하게 된 이스라엘의 파국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농경사회의 다산과 풍요를 관장하는 바알이나 아스타롯에게 성관계는 생산을 위한 필연적인 행위이며, 이를 모방하는 신전 창녀들의 성행위는 자연스러운 의례의 하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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