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가서의 정경적 위치와 해석사
이 사랑 노래가 성서에 포함된 이유는 구약의 정경 형성시기(1세기)에 아가가 알레고리(은유) 방식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가서의 사랑은 구원사 속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 그리스도와 인간 영혼 등의 관계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아가서의 권위를 주장한 랍비 아키바(Aqiba)는 “성서의 다른 책이 성소라면, 아가는 지성소이다.”라고 하면서, 아가서를 세속적인 사랑노래로 읽지 말라고 경고했다.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엄격하게 고수하던 루터(Kiecker 2001:126)나 칼빈조차도 아가서를 은유로 해석하였다. 이는 라쉬(Rashi)나 이븐 에즈라(Ibn Ezra)와 같은 유명한 유대교 주석가들과 동일한 입장이다. 이처럼 성경 본문을 은유로 이해하는 방식은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전통에 해당한다. 따라서 아가서 역시 다른 지혜서들과 마찬가지로 은유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지혜문학이 일반적으로 왕권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또 솔로몬 왕이 그의 지혜로 대단한 명성을 떨쳤기에(1열왕 5,9-12) 오랜 시간 이러한 해석이 유지될 수 있었다.
심지어 12세기 클레르보의 수도원장인 성 버나드는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觀想)하는 데에 가장 유용한 자료로 아가서를 애용했다. 그의 아가서에 대한 설교는 당시 중세 사회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유럽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버나드가 금욕주의자라는 걸 생각하면, 아가서가 관상용 자료라는 사실이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풍조는 20세기까지 이어진다. 예수회 평수사 찰스 리치(Charles Rich)는 자신의 관상용 묵상서에서, “아가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경지에서 느끼게 되는 열렬한 기쁨”의 표현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아가서의 알레고리적 해석이 당대에 논란의 여지없이 정착된 것이었다면, 1세기 말 얌니야 공의회(Council Jamnia)에서 아가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얌니야 공의회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마소라 학파가 아가의 본문을 알레고리로 읽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에 와서는 18세기의 헤르더(Herder)가 아가서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아가서를 성애적인 사랑의 노래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고 보았다(Baildam 1999). 1873년에는 베츠슈타인(Wetzstein)이 아가서와 근대 시리아의 결혼식 축가(wasfs) 사이에 있는 유사성을 주목한 바 있다. 아가서처럼 남녀의 신체 일부를 묘사하는 목록이 그 축가의 특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에는 아가서를 수메르-아카디아의 탐무즈(두무지)와 이쉬타르(이난나)의 신화 배경에서 이해했고, 20세기 중반부 이후로는 아가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세속적인 사랑이야기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앙드레 라콕(Andre LaCocque)은 “아가서의 저자는 남자와 여자를 묶어주는 에로스를 종교인들이 아가페로 잘못 이해하여 대체하는 것에 항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는 성서 중 가장 비성서적이면서, 동시에 시적 미학 뒤에 숨겨진 메시지는 결정적으로 신학적이다.”라고 평가한다.
더욱이 아가서는 아직까지 학자들 간에 창작연대와 저자도 합의점에 이르지 못한 책이다. 바벨론 탈무드에 반영되어 있는 초기 유대교 전승은 아가서가 주전 700년 무렵의 히스기야와 그의 서기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였다. 이런 주장은 아가서에 드러난 고대 근동의 국제어인 아람어의 많은 흔적들을 설명해준다. 또한 이 시기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유사한 사랑노래들과도 일치한다(Keel 1994:5; Nissinen 1998:5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서의 연대를 결정짓는 일을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가서와 비교될 만한 노래가 성서 안에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가서의 언어는 초기 연대(솔로몬 저자설 뒷받침)를 가리키는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고, 후기 연대(솔로몬 저자설 부정)를 가리키는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아가서가 여러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노래들의 모음집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가서가 계속되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라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가서의 주된 내용은 무엇일까, 본고는 그간 아가서를 둘러싼 기존 해석의 권력에서 벗어나 원래의 의미를 보고자 한다. 그것이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에서 말하는 권력의 경로를 파악하는 일이며, 김은규가 구약의 해석틀로 제시하는 종교권력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2. 아가서 3장: 솔로몬과 혼인하는 여인
(친구들)
연기 기둥처럼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
이국의 온갖 향료로 향기를 풍기며 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아가 3,6)
보라, 솔로몬의 가마를!
이스라엘 용사들 가운데에서 뽑힌
예순 명의 용사들이 호위하네. (아가 3,7)
“솔로몬의 가마”를 타고 “이스라엘 용사들 예순 명의 호위”를 받는 여인은 누구일까, 그럴 수 있는 인물은 의심할 것도 없이 솔로몬의 신부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몰약과 유향” 등 “이국의 온갖 향료로 향기를 풍”긴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당시의 주변국들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왕비와 수많은 후궁을 두었다.
후궁실은 왕의 특권이었는데 사울은 최소 1명의 첩을 두고 있었으며(2사무 3,7), 사무엘하 12장 8절에서는 “그의 아내들”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통치하고 있을 때 이미 6명의 부인들을 두고 있었으며(2사무 3,2-5), 이후 예루살렘에 들어와서도 계속 첩들과 아내를 더 취하였고(2사무 5,13; 19,6), 그들 중 특히 밧세바를 총애하였다(2사무 11,27). 르흐보암은 18명의 부인과 60명의 첩들을 두고 있었고(2역대 11,21), 아비야는 14명의 아내들을 두고 있었다(2역대 13,21). 또한 솔로몬으로 추정되는 아가서의 ‘왕’은 60명의 왕비들과 80명의 첩들을 두고 있으나(아가 6,8), 실제 솔로몬은 후궁실에 700명의 부인들과 300명의 첩들이 있었다(1열왕 11,3).
이렇게 많은 후궁실의 부인들 중에서도 왕의 특별한 애정을 누리는 것은 한 여인이었는데, 다윗에게는 밧세바가 그 특권을 누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호의가 그러한 부인에게 공적인 지위와 칭호를 부여할 만큼 충만한 것은 아니었다. 밧세바는 아들인 솔로몬이 왕위의 계승자로 지정되면서 이스라엘 최초로 “최고위의 여주인(그비라)”이 되었고, 솔로몬 사후에도 자신의 영예와 위치를 보존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밧세바의 위세는 아가서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와서 보아라, 시온 아가씨들아,
혼인날, 마음이 기쁜 날에
그 어머니가 면류관을 씌워 준
솔로몬 임금을! (아가 3,11)
솔로몬이 혼인하는 날,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에게 면류관을 씌워 준 것이 그의 어머니, 즉 밧세바임을 밝히고 있다. 그만큼 솔로몬과 밧세바와 아가서의 여인은 서로 관계가 있음이 암시된다.
3. 아가서 5장: 가버린 연인을 찾아
아가서의 여인은 자신을 떠난 연인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 그렇게 간절히 찾아다닐 연인을 왜 떠나게 했을까? 남자 역시 자신의 여인을 사랑했음이 드러난다.
(여자)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 (아가 5,2)
남자는 밤이슬을 맞으며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왔다. 그리고는 여인이 자는 방문을 두드리며 열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는 둘의 관계가 공인된 관계, 곧 부부관계 내지는 양가가 합의한 관계는 아님을 나타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여인의 아래와 같은 대꾸이다.
“옷을 이미 벗었는데
어찌 다시 입으오리까?
발을 이미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오리까?” (아가 5,3)
잠자리에 들었던 여인은 비록 연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마음은 깨어 있었”으나,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그러니 남자에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남자에게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가 방문을 열어 들어오라는 데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의 연인이 문틈으로 손을 내밀자
내 가슴이 그이 때문에 두근거렸네. (아가 5,4)
둘의 행복감은 4절에서 절정에 달한다. 남자는 여인의 방에 들어오겠다는 의미로 “문틈으로 손을 내밀”고, 여인은 “그이 때문에 두근거”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서로 기다리던 만남이었는데 남자가 돌아서고 만다. 도대체 왜?
나의 연인에게 문을 열어 주려고 일어났는데
내 손에서는 몰약이 뚝뚝 듣고
손가락에서 녹아 흐르는 몰약이
문빗장 손잡이 위로 번졌네. (아가 5,5)
문제는 “몰약”이었다. 성경에서는 모두 16번의 ‘몰약’이 등장하는데 주로 고급향료로 사용된다. 몰약은 궁전에서 사는 귀한 사람의 옷에서 나는 향이며(시편 45,9), 왕에게 나아가는 후궁이 몸단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향이다(에스 2,12). 이로 보아 여인은 왕의 후궁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사랑하는 남자는 궁 밖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나의 연인에게 문을 열어 주었네.
그러나 나의 연인은 몸을 돌려 가 버렸다네.
그이가 떠나 버려 나는 넋이 나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고
그이를 불렀건만 대답이 없었네. (아가 5,6)
남자는 여인에 대한 사랑에 들떠 앞뒤 가리지 않고 후궁실을 찾아갔으나, 여인의 손에서 몰약이 흐르는 것을 보고는 현실을 인식하고 만다. 그녀는 자신이랑 맺어질 수 없는 왕의 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말없이 등을 보인 채 그녀를 떠난다. 그러나 여인은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필사적으로 연인을 찾아 성읍을 헤매며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자
나를 때리고 상처 내었으며
성벽의 파수꾼들은 내 겉옷을 빼앗았네. (아가 5,7)
그녀는 밤늦게 돌아다니다가 야경꾼들에게 창녀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파수꾼들에게 겉옷을 빼앗기기도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래도 여인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연인이 혹 다른 여성과 만날까 봐 하소연을 한다.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그대들에게 애원하니
나의 연인을 만나거든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 주어요. (아가 5,8)
이렇게 여인의 사랑은 자신이 놓친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여인은 왕의 여자이므로 종국에는 연인을 떠나보낸다 .
4. 아가서 6장: 서로 엇갈리는 사랑
여인의 사랑은 양을 치는 목자인 연인을 향해 있다.
<나는 정원, 그이는 목자>
(여자)
나의 연인은 자기 정원으로,
발삼 꽃밭으로 내려갔어요.
정원에서 양을 치며
나리꽃을 따려고 내려갔어요. (아가 6,2)
나는 내 연인의 것, 내 연인은 나의 것.
그이는 나리꽃 사이에서 양을 친답니다. (아가 6,3)
여인의 입으로 직접 고백했듯 “나는 내 연인의 것”이고, “내 연인은 나의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관계 규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왕의 눈에 든 후궁이다.
<견줄 데 없는 애인>
(남자)
왕비가 예순 명
후궁이 여든 명
궁녀는 수없이 많지만 (아가 6,8)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
그 어머니의 오직 하나뿐인 딸
그 생모가 아끼는 딸.
그를 보고 아가씨들은 복되다 하고
왕비들과 후궁들은 칭송한다네. (아가 6,9)
아가서 6장 8-9절의 화자는 왕이다. 그는 60명의 왕비와 80명의 후궁과 수많은 궁녀가 있지만,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여인”은 “오직 하나”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 어머니의 오직 하나뿐인 딸”이며 “그 생모가 아끼는 딸”이다. 그렇다면 그 어머니는 누구일까?
아가서의 표제인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에 근거하면 아가서에 등장하는 왕은 솔로몬이 된다. 그리고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로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2사무 11,3)이다. 즉, 밧세바는 유 다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히타이트인이란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딸은 적어도 모계가 이방인인 여성이다. 그러면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아가 1,5) 하는 표현이 자연스럽다. 또한 밧세바가 귀족인 엘리암의 딸이므로, 밧세바의 딸도 “귀족 집 따님”(아가 7,2)이다. 그래서 같은 어머니의 자식인 솔로몬은 그녀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아가 4,9-10; 5,1)라고 부르고, 이 “술람미”(아가 7,1) 여인은 자신의 연인에게 “당신이 내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빨던 오라버니 같다면! 거리에서 당신을 만날 때 누구의 경멸도 받지 않고 나 당신에게 입
맞출 수 있으련만.”(아가 8,1) 하고 안타까워한다.
이렇게 술람미의 여인은 자신의 연인이 “내 어머니의 젖을 함께 빨던 오라버니 같다면,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의 집으로 당신을 이끌어 데려가련만”(아가 8,1-2)이라고 탄식한다. 따라서 아가서의 여인은 밧세바의 딸로, 솔로몬의 누이이자 후궁이 된 여성이라고 할 것이다.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밧세바와 솔로몬에 의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게 된 여인, 그녀가 술람미 여인이다.
5. 알레고리 해석이 덮은 진실
아가서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이해하여 신랑을 야훼로 신부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왕의 절대 권력 아래 이루어진 관계적 폭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는 일이다. 성경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극찬받아 온 아가서가 사실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잃은 여인의 짓밟힌 사랑에 대한 얘기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어머니인 밧세바의 강요에 의해 오라버니인 왕에게 바쳐진 여인이다. 그런데도 아가서 해석자들은 이를 아름답고 풍요로운 사랑이야기로 포장해왔다.
여기에 기여한 세력이 알레고리 기법을 동원한 종교권력이다. 종교권력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종교계의 권위자들이 아가서를 은유로 표현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사랑 이아기로 둔갑시켰다. 즉, 솔로몬은 하느님의 은유이며, 술람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의 은유로 해석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러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해석이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이해하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의 삶에 선택권을 잃고 후궁으로 운명 지워진 여인의 비극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아가서 텍스트에는 권력에 의해 연인과 헤어진 후 연인을 찾아 헤매고 다니다가 폭행당하는 여인의 절절한 목소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비록 그녀가 귀족의 딸(아가 7,2)로 자신의 포도밭을 소유(아가 1,6)할 정도의 재산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왕의 시중을 기꺼이 들어야 하는 운명이다. 결국은 왕과의 혼인을 영광과 축복으로 강요받는 비주체적인 여성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여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아가서 해석자들은 솔로몬 왕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미화하거나, 종교권력 아래 하느님과의 사랑이야기로 포장해왔다.
한편 이러한 아가서의 해석에 반대하여 아가서를 양성평등을 주장한 사랑노래, 특히 주인공 여성이 지배적인 목소리를 내므로 ‘대항문학’이라고까지 결론 내는 것 역시 위험하다. 물론 적나라한 남녀 간의 사랑 묘사와 선정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며, 하느님 신앙을 언급하지 않고 여인의 대사가 더 많다는 점 등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반드시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의도로 읽히지는 않는다. 더욱이 피해자 여성의 목소리를 덮어버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게 폭력적인 해석일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리하면, 아가서의 해석은 그간 종교권력을 둘러싼 종교계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해 왔다고 하겠다. 왕이 곧 신권권력의 대리자였을 때는 왕의 사랑이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은유되었으며, 종교권력은 여인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도 왕과의 아름답고 풍성한 사랑이야기로 둔갑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텍스트의 본문에는 비극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서 우리에게 가려진 시야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6.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선택
2세기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관찰한 의사 가레노스(Claudius Galenus, 129-199)는 그리스도인들이 결혼을 한 후에도 성적인 금욕을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교회는 성욕의 절제를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를 구분하는 상징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초기부터 성에 대하여 매우 큰 혐오와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런 풍조 속에서 남녀 간의 적나라한 사랑과 관능적인 육체미를 찬미하고 있는 아가서를,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노래로 인정해왔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왜 자꾸 성경해석을 뒤집고, 또 풀어헤치고 하는지와 관련된 얘기다. 21세기의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합리적인 사고와 제도가 발달된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과거의 유산으로 화석화되었다. 반면 불합리한 구조와 부조리가 팽배한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사람들을 무지와 폭력으로 억압하는 데 앞장선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듯이 교회도 흥하면 반드시 부패하니 쇠할 것을 바라야 하는가, 그것이 딜레마이다.
우리 인간에게 현명한 선택이란 정녕 없는 것일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고 믿고 있는 우리 인간은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영혼을 상정한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과의 현격한 차이로 종교적 심성을 인간의 특징 중 하나로 꼽는다. 그런데 그런 종교성이 퇴색되고 더렵혀졌다. 마치 두껍게 녹이 슨 거울처럼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녹들을 닦아내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신학의 새로운 작업이다. 즉, 권력과 무지로 보이지 않게 된 진리의 흔적을 복원하는 일, 그것이 거울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해 녹을 닦아내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는 성경해석을 끊임없이 뒤집고, 또 풀어헤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성경은 박제되어 박물관에 과거의 유물로 전시될 것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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