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인간

사라의 하느님, 하갈의 하느님

아난존 2017. 12. 10. 19:41


. 피조물에게 상처 입는 창조주

 

하느님의 야심찬 에덴동산 프로젝트는 피조물에 의해 창조주가 상처 입는 하극상의 결과를 초래하면서 막을 내린다. 이제 더 이상 에덴동산은 인간에게 개방되지 않으며 행여 쫓겨난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돌아올까 봐 거룹(천사)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창세 3,24). 즉 에덴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영원히 살고자 했던 하느님의 계획은 이로써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고통에 내던져진 유한한 생명체인 인간과 새로운 형태로 함께 사는 방식을 계획하신다. 그것이 제의를 통한 기억과 만남의 유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과의 공존 방식 역시 아벨에 대한 카인의 질투로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는 급기야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면서 인간에 대한 실망감으로 하느님은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 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창세 6,3). 그런데 이는 다시 생각해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배신감을 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들 곁에 하느님이 계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어 홍수를 계획하시면서도 노아의 가족만은 남겨 놓으셨다. 그리고는 다시 아브람 때에 이르러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신다. 바로 아브람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을 다시 양육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인간에 의해 하느님은 자신의 계획에 차질을 빚는다. 바로 하느님이 직접 선택하신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가 자손을 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래서 하갈이 등장하게 되며 이스마엘이 출생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은 원래의 방향에서 다시 수정하고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하느님은 아담을 만드신 이후부터 아브라함의 때까지 단 한 번도 본인의 계획대로 일을 이루지 못하셨다.

인간들 곁에서 인간과 함께 영원히 살고자 했던 최초의 계획은 좌초되었으며, 아담의 후손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양육하고자 했던 계획도 카인으로 인해 변경되었다. 이후 타락한 인간 세계가 개선할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자 홍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계획을 세우신다. 그것으로써 인간과 함께 살기 프로젝트를 재가동했으나 홍수 이후에도 인간들의 타락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또 다시 아브람과 사래가 하느님의 백성 만들기 계획에 의해 선택된다. 이렇게 하느님은 피조물인 인간들의 불신에 의해 번번이 창조주로서의 계획을 수정하고 변경하신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의지는 어떤 순간에 왜 변화되는가?

이를 사라와 하갈의 경우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하느님의 원래 계획과 이것이 수정된 형태의 의미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 사라의 하느님  

 

1.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사라 

 

사래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자고 아브람에게 제안했고 아브람은 이를 수용한다. 그리고 아브람의 나이 팔십 육세에 하갈이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을 얻는다(16,16). 이때까지 아브람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자손이 반드시 사래를 통해 나온다고 생각지 않았으며, 사래는 자신이 직접 하느님의 언약을 받지 않았으니 둘 다 하느님을 불신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하느님의 백성 만들기 계획이 사래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하갈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으며 오로지 아브람의 자손이란 것만 알 수 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 다시 하느님이 나타나시어 사래를 통해 자손을 얻는다고 말씀하실 때 아브람은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하고 중얼거렸다(17,17). 이후 손님의 모습으로 야훼가 나타나 사라의 출산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예고할 때도 이를 엿듣던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18,12). 즉 둘 다 야훼가 선택한 백성들의 조상으로 세워져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뀐 이후에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견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더욱이 사라가 이미 오래전에 달거리가 끊겼다는 설명이 이 둘의 불신에 무게를 더해준다(18,11).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와 사라의 나이 구십 세가 그 당시 자손을 낳는데 정말 불가능했을까?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다(12,4). 따라서 당시 사래는 65세가 되는데, 그 나이에도 사래의 미모는 이집트인들을 반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이집트 왕이 사래를 취하는 바람에 야훼의 재앙을 받게 된다(12,14-17). 사래의 이런 미모는 89세에 사라로 세워진 후로도 변치 않는데, 이는 사라 시절에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불려 들어가기 때문이다(20,2). 이로 미루어 사라는 무척 아름다운 여인임은 물론 엄청난 동안이었거나, 아니면 기원전 1900년 무렵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디 늙었다고 하겠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205살에 죽은 것으로 보아 사람의 수명이 지금보다 길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사라는 구십 세에 이삭을 낳고도 37년을 더 살다가 127세에 죽는다(23,1). 게다가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후 크투라라는 아내를 다시 맞아들여 그 사이에서도 자손을 여럿 두고는 175세에 죽는다(25,1-7). 오늘날의 평균 수명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긴 수명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야훼에 대한 불신은 지나치다고 할 수준이다. 왜 그랬을까? 그건 아마도 야훼가 아브람에게 등장하기 전까지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은 신이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노아가 창조주로 인식하고 있었던 야훼, 그런 노아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백성들 사이에서도 야훼는 강력한 신으로 각인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바벨탑을 쌓을 생각도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은 바벨탑 사건의 배후에 야훼가 존재하는지 모른 채 흩어졌다. 즉 야훼는 노아 이후 사람들의 삶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굳이 알리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아브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그러니 계약의 당사자도 아닌 사라가 야훼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직접 야훼와 언약을 맺은 아브람도 야훼와의 관계가 진행되면서 믿음을 쌓아나갔으며 야훼 역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세우신 후에도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마지막까지 해 보셨다. 이로써 야훼는 노아 이후,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던 창조주의 자리를 다시 아담 때처럼 인간의 곁에 두고자 하신다. 그러기 위해 사라의 후손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이다.


2. 양도되지 않는 권리 

 

야훼는 이스마엘의 탄생 후에도 여전히 많은 민족의 어머니, 즉 그 민족들을 다스릴 왕손의 조상으로 사라를 선택하신다. 그래서 사라의 자식인 이삭과 이삭의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고 언약하신다(17,15-19). 사라가 야훼의 약속을 믿거나 말거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라에게 야훼는 친숙하지 않은 신이며 아직 체험되지 않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실행이 이루어지면서 야훼는 사라에게 그의 하느님으로 자리 잡아간다.

사래는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아브람의 아내로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에게 먼저 권한 것도 사래이다. 그러나 하갈이 임신 후 자신을 업신여기자 그녀를 마음대로 할 권리를 아브람에게 허락받는다. 아브람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하갈에 대해 사래에게 당신의 몸종인데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16,6)라고 말한다.

하갈은 아브람의 아이를 임신했는데도 여전히 사라의 몸종에서 풀려나지도, 아브람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지도 못한다. 당시 출산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사래가 하갈을 통해 아브람의 아들을 얻고자 했고, 하갈이 태기가 있자 주인을 업신여겼으며, 사래가 임신한 하갈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하갈의 행동에 대해 아브람에게 호소한 것만으로 봐도 임신은 중요한 신분 상승의 기회였을 텐데, 그것이 하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마도 사래 역시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의 딸로서 사래는 아브람의 아내이자 동시에 배다른 남매였기에 부족 안에서의 권리가 동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라에 대한 대우는 야훼에게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야훼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이집트 여종의 후손을 최초 계약의 대상자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아브람과 맺은 계약의 대상자는 어디까지나 사라의 후손인 이삭으로 이어져야 했다. 여기서 야훼는 자신의 처음 계획을 변경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각인시킴으로써 선약의 중요성을 상기하게 만든다.

 

. 하갈의 하느님

 

1.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은 하갈

 

하갈은 이집트인, 즉 가나안에서는 이방인이며 사라의 몸종 신분이다. 따라서 이중의 억압 아래 있는 약자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계기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엿보지만 실패한다. 그리고는 박대하는 사래를 피해 도망친다. 이런 하갈의 행동은의지할 데가 아무것도 없는 처지의 여성치고는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하갈에게 야훼는 남의 하느님일 뿐이었다. 그런 하갈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사래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래서 하갈은 자기에게 말씀해 주시는 야훼를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라고 불렀다(16,13).

이렇게 하갈은 야훼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사래가 아브람을 통해 처음 야훼를 인식했던 것에 비해 하갈은 직접적으로 야훼를 자신의 하느님으로서 만난 것이다. 즉 사래가 남편과 부족의 보호 아래 그 연장선에서 야훼와 관계를 맺었다면 하갈은 후견인 없는 단독자로서 아무런 보호 없이 야훼와 관계를 맺었다. 이때 하갈에게 야훼는 사라에게 했던 축복과 동일한 내용으로 약속하신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16,10) 그러나 이스마엘의 미래가 밝지는 않다. 야훼의 천사는 하갈에게 네 아들은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16,12)라고 미래의 사실을 전달한다.

이런 사실의 전달은 축복같이 하느님의 의지가 개입된 서술과 수사적 차이를 보인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에서 보듯이 축복은 내가라는 의지적 주체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라는 주체의 의도적인 개입 없이 행위의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단순 사실의 전달에는 하느님이 주체로 서술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스마엘에 대한 미래 이야기는 하느님의 저주가 아니라 사실의 전달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시간이 인간의 직선적인 시간과 다르다는 전제를 간과하면 성서 내용의 많은 부분을 오해하게 된다.

하갈이 낳을 아들인 이스마엘은 야훼와의 직접 계약자인 아브람의 자손이지만 원래 야훼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스마엘의 탄생은 임신을 하지 못하는 사래의 초조함이 낳은 의외의 결과이다. 그래서 아브람도 하갈에 대한 부채감을 갖지 않는다. 정리하면 이스마엘의 어머니가 될 하갈의 운명은 처음부터 야훼의 계획이 아니었으며 아브람의 의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사래의 생각대로 움직여서 나온 결과물이다. 따라서 이스마엘에 대한 책임을 사래가 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이삭을 낳게 된 사라는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21,10)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한다.

이는 이스마엘의 존재가 사라 자신의 의지가 투영된 결과임을 간과하는 매우 편협한 발상이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런 사라의 부당한 요구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급기야 야훼는 사라의 뜻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이런 진행은 자칫 사라에 대한 야훼의 지나친 편애로 해석될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스마엘은 처음부터 야훼의 계획에 있지 않았으며, 이스마엘이 미래에 형제간의 싸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하느님으로서도 이스마엘의 운명에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과 인간의 의지가 충돌했을 때 인간의 자율성이 우선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은 미래의 일을 예언할 순 있어도 미래 자체를 임의대로 바꿔버리지 않는, 어쩌면 바꿔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사래의 판단착오로 이스마엘이 탄생하긴 했지만 하느님은 아브람의 아들인 이스마엘에게도 이삭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함께 주신다. 비록 그것이 골육간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해도 인간의 자율성 없이 미래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은 자신의 최초 계획을 인간들의 의지에 따라 거듭 수정하고 변경하신다.


2. 새로 세워진 권리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곧바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하갈은 소리 내어 우는 이스마엘을 주저앉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때 하느님은 천사를 시켜 하갈을 위로하시고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이 보이게 하셨다(21,16-19).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러나 사실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갈에게 먼저 약속하신 대로 이스마엘을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변경된 약속 이행은 자신의 원래 계획에서 멀어져 인류가 긴 시간을 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렇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선택의 의지를 부여하는 것으로 피조물의 위치를 격상시키신다.

이후 이스마엘은 바란 사막에서 살았는데 그는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었고, 하갈은 자신의 고향인 이집트 땅에서 며느리감을 골라 이스마엘의 아내로 맞아들였다(21,20-21). 그리고 아브라함의 장례를 이삭과 이스마엘이 같이 치른 것으로 보아 형제간의 교류는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했던 축복을 언약대로 이삭에게 내려 주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수인 이스마엘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마엘에게 내린 축복은 하갈에게 약속하신 거라는 데 차이가 있다. 후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거처 문제로 고민할 때 아브라함에게도 이스마엘의 미래를 약속하시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갈과의 약속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몰론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핏줄이어서 내치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큰 민족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하갈이 갖는 위치적 중요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스마엘은 열두 아들을 낳는데 이들의 이름은 그들이 모여 사는 천막촌의 이름이요, 열두 부족의 대표 이름이기도 하다. 이렇게 야훼의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룬 뒤 이스마엘은 137세에 죽는다. 그리고 이스마엘 사람들은 이집트 동쪽 아시리아로 가는 도중인 수르에 퍼져 살면서 예언대로 모든 골육의 형제들과 맞서게 된다(25,16-18). 하느님은 이런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지 않으셨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하갈과의 약속을 지키셨던 것이다. 하느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못하시며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에 의한 실수까지도 자신의 역사로 끌어안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것이 하느님의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방식이라고 하겠다.


 . 다시 인간 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아담의 하느님이며 노아의 하느님이신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일관되게 원하시는 게 있었다. 바로 인간들과 함께 인간들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고자 했던 최초의 계획인 에덴동산이 좌초되자 인간 곁을 떠나 제의의 형태로 공존하는 방식을 선택하신다. 그러다가 인간 세상의 타락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다시 야훼는 노아를 통해 제2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시도하신다. 그러나 이것도 바벨탑 사건과 소돔성의 멸망에서 보듯이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제3의 프로젝트가 아브라함을 통해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이뤄나갈 동반자로 사라가 선택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라의 개입으로 하갈이란 변수가 등장했고 이제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 양쪽에서 전개되며 확장된다.

그렇게 하느님은 자신의 계획을 또 다시 수정하고 변경하신다. 왜 그런 수고를 거듭 하실까? 인간과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만 포기하시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인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실까? 최초의 인간을 만드셨듯이, 만물을 만드신 전력으로 현재 인간의 문제를 개선한 더 나은 생명체를 다시 창조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의 현생 인류가 최선의 피조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마도 그런 접근이 하느님의 꺾이지 않는 계획, 즉 인간과 함께 살기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데 가장 근거리일지 모른다.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선택하고 책임지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불행한 미래를 미리 볼 수 있어도 예언만 하실 뿐 그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지 않으신다. 그로 인해 야훼 자신도 상처를 입지만 그것을 감당함으로써 인류와 공존하신다.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 인간 곁에서 살아가시는 존재의 방식이다. 직접 선택한 백성인 사라의 권리는 사라가 야훼 자신에게 보인 불신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끝까지 지켜 줌으로써 야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셨다. 또한 자신의 계획에 없었던 하갈에게는 하갈의 권리를 새롭게 세워줌으로써 모두의 하느님이란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사라의 하느님은 언제든 하갈의 하느님인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전 인류의 하느님이 되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지, 그렇다면 나의 하느님은 언제든지 너의 하느님이 되실 수 있기에 우리는 그 누구도 선민의식을 가질 수 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관계의 선후성이 곧 우열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