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이 된다는 것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

아난존 2022. 11. 5. 14:40

 

패러다임의 전환 시기엔 사건, 사고가 많다. 한국 민족종교에선 지금을 가을이 오기 위한 해원의 시대라고 하니 그 원을 풀기 위해선 시끄럽고 요란할 수밖에 없고, 기독교적으로 보자면 새 세상이 오기 위해선 옛것이 무너지는 시기가 먼저 와야 하는 거고, 힌두교적으로 봐도 창조가 시작되려면 반드시 파괴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어차피 세상은 망조라는 거냐? 그럴 것이다. 아마도 와야 하는 건 올 수밖에 없는 거, 그게 개인이든 세상이든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이런 전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각자에게 남은 건 각자 자신을 돌보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그건 자신을 지키는 일, 그것뿐이다.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며 나를 지키든, 남을 도우며 나를 지키든, 내 일에 몰입하며 나를 지키든,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며 나를 지키든 또는 그 반대이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이 유일한 구원이다.

 

음모론에 빠지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음모론에 빠져도 내가 왜 음모론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거고, 모든 사건이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믿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거다.

 

우리가 사는 복잡계에선 하나의 이유와 하나의 조건만으로 현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가 윤석렬 대통령과 그를 찍은 사람들의 탓이라고 말하는 크기만큼 이 사태가 탄핵의 빌미를 잡기 위한 좌파와 민노총의 기획이란 음모론도 커지고 있다.

 

강원도의 레고랜드 사태가 채권시장의 위기를 앞당겨 진태양난이니 진태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니 하는 말이 돌 듯이, 화기가 꽉 찬 공간에선 누군가 담배를 피우려고 무심코 성냥을 켠 그 행위 하나로 공간 전체가 통째로 폭발해 버린다. 그저 담배를 피우려고 했을 뿐인데, 그 누군가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폭발 직전의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게 도화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튜브의 알고리즘 세계 이전에도 우린 각자의 세상에서만 존재해왔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게 인간인데 어쩌란 말이냐. 맞다! 그게 우리 인간이다. 층층이 세대별 계층별 성별 지역별 직업별 기타 등등 같은 한국어인데도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우리의 가시권이라는 게 매우 제한적이라 봐도 보이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이냐.

 

그러니까 그걸 아는 게 필요하다는 거다. 내가 매우 제한적인 시야로 제한적인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제한적인 존재라는 거, 그걸 알기만 해도 상대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한풀 꺾일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증오의 상대가 필요하고 혐오의 대상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그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해원의 시대고 종말의 시대이니 원망과 원한이 한바탕 굿판을 벌이고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한층 성숙한 인류여서 그런 죽음의 굿판 없이 이 시대가 지나가면 좋겠지만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기후변화, 국가부도, 억울한 떼죽음들을 보면 그냥 지나갈 만큼 우리가 성숙한 미래의 인류는 아닌 듯싶다.

 

우리나라에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날 인도에선 축제를 즐기려고 모여든 사람들의 무게를 못 이기고 다리가 무너져 140명 이상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우리의 이태원에선 밀어를 외쳤던 사람들이 있었고, 인도에선 양팔로 다리 난간을 붙잡고 흔드는 남자의 영상이 남아서 돌아다닌다.

 

그들에겐 그냥 장난일 수 있었으나 그 결과가 참혹하니 누군가는 분노하는 대중을 달래줄 희생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 가짜왕 제도가 그랬듯이, 대중에겐 항상 분노를 쏟아낼 희생양이 필요하다. 여기에 여야 따로 없고 진보 보수 따로 없다.

 

신천지 성장의 토대가 된 그 문제의 모략 전도는, 사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는 정치적 신념과 닿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독재의 논리가 되기도 했고 운동권의 논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대중의 지적 능력, 즉 집단지성이 확장되고 있으니 대중의 깨어남으로 인해 성숙해지는 사회로 넘어가야 한다. 덜 다치고 덜 억울하고 덜 아픈 사회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가 각자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분노하는 대중의 일원이 되지 않고 집단지성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는 것, 나 한 사람을 정제해서 우리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분노의 총량을 줄이는 것, 내가 도화선이 되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키고 내 안의 나 자신과 마주할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