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이 된다는 것

핼러윈의 악몽, 귀신의 해코지

아난존 2022. 11. 7. 14:14

 

악령이 해코지 못 하도록 악령 분장을 하는 풍습에서 비롯됐다는 고대 켈트족의 문화인 귀신분장 축제는 이후 가톨릭에 의해 성인의 날전야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즉 핼러윈 이브가 된 것이다. 이는 예수 탄신일인 크리스마스가 당시 로마의 최고 인기신인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인 것과 같은 이유다.

 

기존의 토착문화가 새로운 지배문화와 접목되면서 민중의 풍속이 제도화되는 과정, 그 속에서 민중의 자발적 에너지를 제도권 내로 편입시키는 방식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로 넘어온 핼러윈데이가 그런 발생적 의미를 담고 오지는 않았다.

 

2002년 월드컵에서 경험했듯 우린 축제가 부족한 민족이다. 놀 타이밍에 제대로 놀지 못해서 개인이나 사회나 노는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달까, 게다가 우리 조상님들의 특징이 음주가무라고 익히 중국인들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증명해 놓았고, 동네마다 구석구석 존재하는 노래방과 한류 열풍을 보면 음주가무에 특화된, 잘 노는 민족의 피가 우리에게 면면히 흐르는 것도 같다.

 

그런데 성장제일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결합하면서 우리의 타고난 유희적 기질을 발휘하지 못하다 보니 놀 때도 한 맺힌 것처럼 논다. 휴가도 열심히 쉬어야 할 업무의 연장이고, 축제도 열심히 즐겨야 할 과제의 연장이다. 즐겨야 한다는 압박감과 누려야 한다는 당위성. 그렇게 제대로 놀지 못하는 놀이문화는 부자연스럽고 음습한 일탈적 문화를 만든다. 그렇다고 핼러윈데이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얘긴 아니다. 즐겁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니까.

 

다만 그 인파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이란 게 참 많은 에너지를 요하겠구나 싶기는 하다. 그만큼 우리한테 축제문화가 너무 빈곤하다는 거, 그리고 이제는 놀다 죽었다부터 나라가 죽였다까지 이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이태원 참사는 갈등의 증폭기 역할을 할 거라는 거, 세월호에 질린 사람들과 세월호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간극, 이 극명한 차이를 보게 될 거란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해온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갈등도 그만큼 우리가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나의 의견을 강요받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조차 극단적 긍정주의라 비판받을 수 있겠으나, 그러나 통제된 사회에서 사는 것보단 그래도 무질서해 보여도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가 더 낫지 않을까.

 

굳이 라는 고유한 존재를, 이 우주에서 오직 하나인 를 구태여 특정 집단에 속박시켜야 할까. 민주당을 지지하다가 국힘당을 지지할 수도 있는 거고, 기독교 신자였다가 불교 신자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종교를 부정했다가 인정할 수도 있는 거고,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거고, 세상이 변하는데 굳이 만 변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 해서 말이다. 그때의 내가 문제였던 게 아니라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