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이 된다는 것

윌 스미스 폭력 사태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 유머와 조롱의 경계

아난존 2022. 4. 1. 15:48

 

유명 배우 윌 스미스가 생방송 중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는 모습이 전 세계로 전파를 탔다. ! 세상에 이런 일이! 그 장면이 너무 낯설어서 순간 연출인가? 헷갈릴 정도였다, 현장 분위기도 그랬단다. 시상자인 크리스 록의 농담이 윌 스미스의 아내인 제이다 핀켓을 화나게 해서 그랬다는 건데, 참 예측불허의 시대다, 별일이 다 일어난다.

 

거기다 제이다 핀켓은 본인도 유명 배우다, 사생활이 기사가 되는 직업군, 자신의 외모가 곧 고급상품이며 자신의 인생이 곧 자산가치인 셀럽.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기에 고액의 출연료와 광고료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그것도 넘사벽 셀럽들의 파티, 대중에게 영화라는 상품의 가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행사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런데 농담이 유머가 되느냐 조롱이 되느냐 그 기준은 뭘까? 그동안 종종 미국영화에서 보여주던, 등장인물이 다 죽어가면서도 농담을 남발하던 미국식 유머가 이제 효용이 다했나 싶어 아쉽다. 분명 크리스 록의 농담은 조롱보단 유머에 가깝지 않았나? 제이다 핀켓이 아프다곤 하나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는 상태였고, 삭발이라곤 하나 여배우답게 화려한 드레스에 우월한 비주얼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농담도, 여주가 군인으로 나와 삭발한 영화, 그거 차기작 나오면 캐스팅되겠는데? 였다. 탈모에도 굴하지 않고 삭발 스트레스를 이기고 전 세계로 영상이 나가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삭발한 상태로 우아하게 드레스를 소화하고 있는 당당한 여배우에게 보낸 농담이었다. 이 농담은 그녀를 초라하게 보이게 하기보단 오히려 그녀의 과감한 선택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시상식에 안 올 수도 있었고 가발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제이다 핀켓은 삭발 상태에서도 여배우로서 충분히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다해도 농담의 대상자가 조롱으로 받아들였다면 할 말은 없다. 이런 건 주관의 영역이니까 의도와 상관없이 대상자가 싫다면 싫은 거다. 어차피 폭력 사태는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후 문제는 그들끼리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건 이 기사를 접한 한국 네티즌들의 반응이다. 가족은 건드리는 거 아니다, 맞을 만했네, 이런 댓글이 압도적이었다는 거, 이건 또 뭘까? 1인 가구 폭증에 높은 이혼율, 낮은 출산율, 엄청난 자살률의 세계적 기록을 가진 나라에서 이 뜨거운 가족애는 또 뭐지? 대체 왜 이렇게들 화가 나 있는 걸까? 우리 한국인에겐 항상 화를 낼 누군가가 필요해 보인다. 이 정도면 한국 사회는 빨간불?

 

현대사회는 다양성을 당위적으로 인정한다. 당연한 거 아냐? 이런 태도. 그런데 막상 다양성에 대한 이해도는 낮다 보니 타자와의 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왜냐, 내가 모르는 영역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고, 죽을 때까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많다는 얘기니까. 공적 영역에 피해만 안 준다면 사적 영역은 얼마든지 배려해 주마, 이런 마인드가 대단히 바람직한 방향인 건 맞지만 막상 이뤄지고 있는 양상은 조각조각 갈라진 현실이다.

 

한국어지만 같은 한국어가 아니라 소통은 안 되고, 이런 불통이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니 개개인은 고립되고, 고립을 인정하면 외로우니 사람들을 만나고 근데 더 외롭고, 나는 타인과 다르나 차이는 곧 차별의 근거가 되니 나 자신을 숨겨야 하고, 나를 꾹꾹 누른 채 소속집단의 다수로서 살아가려니 마음 깊은 곳에 울컥울컥 분노가 쌓인다. 그런 분노를 해결하려고 분노의 분모를 찾아 무리를 형성하지만 그것이 분자인 개인의 마음에 평화를 주진 못한다. 결국 해소되지 못한 분노는 썩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촉각을 곤두세우며 맘껏 혐오할 대상을 찾아 인터넷을 떠돈다. 걸리기만 걸려 봐라, 그러나 아무리 타인을 상대로 분풀이해도 막상 돌아오는 건 자신의 지금 현실이고 이런 자각은 더 큰 분노를 부른다. 현자 타임,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는 내가 접한 현실만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오직 나만 바꿀 수 있다. 세상도 타인도 내가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바꾸려고 해도 안 된다. 내가 뭐길래, 남에게 영향을 주려 하는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네? 미국 사회는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정리할까, 이 정도 관심이면 족하지 않나 싶다. 가족 운운, 내 아내 운운은 선 넘은 거다. 왜냐면 상황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맥락도 다르고 무엇보다 사람이 다르다. 그런데 자꾸 단순 비교를 하면서 스스로 분노를 확인한다. 다양성은 이렇게 다양하게 획일화되며 우리 사회는 전체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그 안에서 개인의 고립은 더 강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