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트라우마가 있고 그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발작 버튼이 작동한다. 나는 위선과 가식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진다. 이게 왜 나의 트라우마가 됐을까 긴 시간 많이 생각해봤지만 잘 모르겠다. 어릴 땐 남자의 허세와 여자의 허영이 싫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나이 되고 보니 그냥 인간의 종특인 위선과 가식이 싫은 거였다. 허세와 허영이 후천적으로 주입된 자기방어체제라면 위선과 가식은 선천적인 자가면역체제 같은, 그래서 인간 유전자 깊숙이 흐르는 원죄 같은 느낌?
그렇다면 나는 그냥 액면가의 인간이 싫은 거다. 세상에 맙소사! 인간 고유의 종특을 혐오하니 어쩔 것인가, 그래서 내가 염세주의자?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렇지 않을까 싶다. 부정부패를 나눠진 인간끼리 서로서로 감싸주듯 그렇게 다수의 인간은 부조리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연대의식을 높여가는데 내가 뭐라고, 우리 바닥까지 투명해 보자, 이렇게 나오니 협박처럼 보이고 자폭처럼 생각되겠지? 나는 왜? 대체 왜?
거짓과 진실이 구분되지 않는 메타버스가 곧 도래할 세상에서, 메타 욕망은 차라리 신성하다고 느끼면서 왜 액면가 그대로의 가식은 지나치지 못할까? 결벽증? 강박? 사람을 믿었던 마음에 대한 배신감이 상처로 남아서? 그것을 여전히 치유하지 못한 채 트라우마가 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어서? 동굴에서 혼자 자족하며 이젠 좀 괜찮네, 하다가도 그게 동굴 밖 몇 걸음 나가기도 전에 박살 나는 현실과 부딪힐 때면, 나도 참 멘탈 약하다 싶다. 그릇 작은 거야 타고난 거고, 멘탈은 경험과 분석의 힘으로 연습하면 강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참 그렇게 되지 않는다.
문제를 만나면 즉시 회피가 체화된 상태라 이번엔 극복해보자 싶다가도 후다닥 다시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싫은 사람은 안 보고 싶어, 그런데 그렇게 인간관계를 칼같이 정리해봤자 원한만 사지, 어차피 시간 지나면 멀어지고 흐려지고 잊히는 건데,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척지며 살아온 거, 그게 반복할 만큼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주어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더 이상 원한 사고 척지는 일은 하지 말자. 그게 이번 생에서 내가 깨달은 거라면 깨달은 거? 요절이 내 운명이 아닌 거 보면 나는 이번 생에서 절정과 찬란함만 기억하며 떠날 수 없다는 거고, 인생의 쇠락과 비루함을 배워야 한다면 이제 내게 남은 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절박함뿐이다. 이제부터는 변화하지 않으면 굳어버리니까, 그럼 오래 살아 봐야 하등 장점이 없으니까. 모르고 죽었으면 서운할 새로운 것들을 탐닉하며 살자, 그래야 내게 긴 시간을 허락한 운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살아보니 오판이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나는 tmi가 됐을까? (0) | 2022.09.18 |
---|---|
슬퍼도 사는 것과 슬퍼서 사는 것의 차이 (0) | 2022.09.17 |
내가 난데, 2022년이라고 뭐가 다를까? (0) | 2022.01.04 |
에난티오드로미아로 본 가세연 관찰기 (0) | 2021.11.16 |
나는 나를 불신한다 (0) | 2021.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