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흘러들어온 조수미의 ‘나 가거든’ 때문에 일시정지 상태가 된 나, 아 나의 18번,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선곡하면 분위기 확 다운시켜서 귀가 시간을 앞당기게 만드는 불후의 우울곡,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여기서 ‘슬퍼도’가 주는 무기력감을 ‘슬퍼서’가 의지로 방어하는 이 부분이 좋아서 자꾸만 부르게 되는 노래, 나 가거든.
나는 언제 갈지도 모르면서, 항상 오늘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말에 확 꽂혀서 대체로 그렇게 살아왔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며 당장 눈앞의 사람에게 성실하게, 내일 곧 죽어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오늘에 미련을 갖지 않도록.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건재하다, 그런데 마냥 건재하기만 하다, 이게 감사하지 않다는 소린 아니다, 당연히 감사하다. 다만, 진짜 다만, 나는 그렇게 어영부영 감사하다 어느 날 불쑥 지천명의 나이가 되자 당황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아니 자백인가? 시간이란 고문관 앞에서 지레 겁먹어 지르는 비명 같은 거니까.
나는 비교적 나 좋을 대로, 내 맘 가는 대로 살아왔는데,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누구 하나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태로 나이 들어 버렸다는 거,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누구 하나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거, 어느 날 문득 나 이번 생은 글렀어 상태에 깨달음의 현타가 왔다. 제대로 멘붕, 이래서 갱년기 우울증이 무섭다는 거였나? 남은 시간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면 살뜰한 계획이라도 세워볼 텐데, 이런 편의성이 허락되지 않은 게 우리 삶이니까.
언제 갈지 모르니까 오늘에 충실하자는 말은 역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 미래를 위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는데, 나는 미래라는 시간에 맨몸으로 서 있는, 시간을 추행하는 바바리맨? 그처럼 속옷 없이 바바리만 걸친 모습이 된 것이다. 맙소사! 그래서 이제는 정말 슬퍼도 살아야 하는 감상적인 인간이 아닌 슬퍼서 살아야 하는 의지적인 인간이 되게 돼버렸다. 나에 대한 직무유기가 부른 때늦은 자각? 이번 생이 글렀다면 다음 생도 그를 것이기에.
적어도 이번 생을 선택했을 이유, 이에 대한 앎과 그 앎에 대한 실행이 없다면 나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 또 어리석음을 재탕하며 시지푸스의 인생을 살게 될지도, 이런 쳇바퀴 인생을 무슨 깨달음이라도 되는 양 다음 생도 자아도취에 빠져 살게 될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금의 이 현생에서 남은 시간을 잉여인간, 민폐인간으로 살게 될지도. 그러니 남은 시간은 이제 준비된 시간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누구 하나쯤은 돌볼 수 있는 인간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래야 이번 생의 과제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본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기에.
그래서 슬퍼서 사는 것과 슬퍼도 사는 것의 차이가 뭐냐고? 슬픔을 느낀다는 건 내가 영혼 이 살아있는 인간이란 증거다. 본능적인 분노와는 다른,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세상을 알기에 느끼는 연민, 누구 탓도 할 수 없기에 쓸쓸하지만 공허하지 않다는 점에서 쓸쓸함과도 다른 의지적 감정, 그래서 자주 외로운 사람은 슬픔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 안에 빠져 있지 않아야 타인과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고, 그래야만 슬퍼도 사는 게 아닌 슬퍼서 사는 게 가능해진다. 자아가 열린 상태에서 세상과 만날 때 비로소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런 고통의 매듭을 푸는 게 슬픔이란 걸 깨달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영혼과 조근조근 교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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