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2021년이었는데 오늘은 2022년이란다. 그게 뭐? 나라마다 새해도 다르고 시간도 다른데, 우린 이렇게 하자, 그렇게 정한 것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 감흥이 참 없기도 없다. 어쨌든 나이 들수록 1년이란 시간 감각이 짧게 느껴지긴 하지만, 지구가 공전을 멈추지 않는 한 1년은 365일일 거고, 자전을 멈추지 않는 한 1일은 24시간이겠지, 뭐 어쩌라고?
그런데 삶이 이어진다. 자전 따위 무시하고 싶어도 해가 지고 해가 뜬다. 공전 따위 무시하고 싶어도 육체가 노화되고 망가진다. 시대와 동떨어져 있어도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와 친화적이지 않아도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간다. 내가 난데, 그렇게 생각해봤자 시공의 영향을 받는 육체를 가진 생명체가 완전한 실존적 개체를 주장할 순 없다. 더하여 사회생태계의 하단에 위치할수록 삶은 더 수동적이고 피동적일 위험에 처한다.
그런데 수동적이고 피동적인데 자유롭다? 어떻게? 알코올중독이 될 자유? 분노조절장애가 될 자유? 폭력적일 자유? 천박해질 자유? 돈의 노예가 될 자유? 정말 그런 걸 자유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자유를 모르는 사람이다. 내 의지로 선택한 상황이 아닌, 의지를 버리는 것도 자유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자유를 모른다는 증명이다. 마음껏 먹어서 비만해질 자유? 마음껏 도박이나 게임에 빠질 자유? 마음껏 괴롭거나 우울해질 자유? 대체 여기 어느 부분에 주체적 의지가 개입하는가?
내가 난데, 이건 데카르트의 실존만큼 확실한데, 그럼 나는 진짜 무엇을 원하지? 이건 니체의 죽음만큼 잘 모르겠다. 나이 들수록 점점 가속도가 붙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인생이 어느 날 덜컥 멈출까 조바심 내며 간신히 매달려있는 현실에서,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누구인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떨어지면 나락이란 불안감에, 저 아래는 실패자, 괴물, 쓰레기들의 땅만 같아서, 어떻게든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올 생각을 못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막상 컨베이어 벨트 아래는 까마득한 지하세계, 그런 어둠과 공포의 세상이 아니라, 맨발로 디디고 걸을 수 있는 땅, 풀과 꽃이 자라는 멀쩡한 땅이라면?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떨어진 절망의 나락이 사실은 가장 안전한 땅이라면? 굳이 나의 의지를 망각해야 버틸 수 있는 컨베이어 벨트가 허상이라면?
나는 나에게 묻는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뛰어내렸다고 절망하는가?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향해 사다리를 꽂고 오르고 싶은가? 이 삶에서 무엇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또는 견딜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는 건 희망은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적어도 죽어야 내려올 수 있는 컨베이어 벨트도, 허공에 닿아 있는 사다리도 희망은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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