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오판이었어

나는 나를 불신한다

아난존 2021. 11. 14. 17:50

 

나는 사람의 이면을 볼 줄 모른다. 그걸 보라는 말을 20년 넘게 들었지만, 안 보이는데? 뻔히 보면서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드는 생각, 나만 그런가? ! 그랬다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지금도 유용할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남의 속을 안다고 할까? 그렇다! 일단 관계 초반엔 불신하고 보는 것이다. 선의를 가장한 속내가 있을걸? 그게 인간이야, 그러면서 마음을 주지 않으니 크게 상처받을 일도 뒤통수를 맞을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다음 관계 중반엔 상대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세상 선한 얼굴로 선한 말들을 해봐야 행동이 그렇지 않으면, 역시 내가 생각한 게 맞았어, 확신이 선다. 그래서 관계 후반엔 지나가는 인연으로 정리하면서, 그래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지, 그렇게 결론이 난다.

 

사실 그러면 적어도 손해 보며 살진 않는다. 대신 안전하고 재미없는 인생으로 친구도 없지만 적도 없는 방어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 운전도 방어운전이 최선 아닌가! 그리고 이런 삶의 태도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모두가 저마다 포식자가 되려는 피곤한 관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민주주의잖아, 나도 너만큼 존엄해, 그래서 점점 혼자 노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피식자가 되지 않기 위해 포식자를 피해 사는 사람들.

 

나도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사람들의 이면이 안 보이니 일단 상대가 보여주는 대로 믿고 출발하자는 그 용감 무지한 행동이 얼마나 철없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어리석으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나는 뭐든 직접 겪어 봐야 비로소 깨닫는다. 어쩌겠어요, 1명의 친구를 얻기 위해서 99명에게 상처를 입는다 해도, 1명을 얻으려면 일단 인연이 된 사람들 모두와 마음을 열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무식한 소릴 20년 전의 내가 했다. 이게 왜 무식한 소리일까? 나는 그 정도로 심지가 굳지도, 배포가 크지도 않은 사람이란 걸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무지로 나 자신을 오해해서 했던 생각과 말들, 내가 나를 너무 몰라서 저지른 실수들.

 

그래서 이번 대선부턴 사람을 지지하지 않기로 했다. 나꼼수를 덜 믿었더라면 김어준의 몰빵론에 그렇게 충격받지 않았을 것이다. 몰빵론이야말로 제대로 된 선전 선동이었는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게 먹히는 걸 보면서, 저들에겐 게임 같은 정치판인데 내가 너무 진지했구나 싶었다. 내가 정치를 도박판의 게임 말 보듯이 할 수 없다면, 아무리 적은 당비라도 그건 내게 사치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열린민주당 당원이었고, 그전엔 정의당 당원이었고, 지역구는 항상 민주당을 찍었다.

 

또 나는 윤지오를 수상하게 보는 지인에게 피의 쉴드를 쳤던 과오도 있다. 자신이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억울하게 죽은 동료를 위해 나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이렇게 교만을 떨었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그녀의 행동과 말을 면밀히 봤다면,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어쩔 수 없이 눈치챌 만큼 그녀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후 그녀의 행동은, 어후~ 더 이상 말을 말자.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녀의 증언이 고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됐다는 거다. 장자연은 대중에게 잊히고, 윤지오는 왜 수사 안 받냐는 말만 무성하다. 죽은 사람, 그것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 갖고 장사라니, 그냥 경이롭고 어이없고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후 안민석이 의심되면서 최순실 재산에 대한 그의 말들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최순실 사건을 함께 캤던 주진우도 함께.

 

정치인이나 정치권 주변인에게 인생이란 자신을 통째로 걸고 노는 도박이다. 그래서 이들 중엔 스포츠에 열광하는 등 승부가 나는 일에 몰입하는 걸 좋아한다. 아이러니하지만 가세연은 나꼼수의 보수 버전이다. 나꼼수의 정신을 가장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는 적장자가 가세연이라고 하면 양쪽에서 다 불쾌해하려나? 나꼼수는 정의고 가세연은 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정할 수 없겠지만, 또는 반대로 가세연은 애국이고 나꼼수는 자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화를 내겠지만, 기득권의 권위를 해체하는 방식, 그 낄낄거림의 원조는 단연 나꼼수이다.

 

사실과 조롱이 반죽되면 그 질감이 쫀쫀해져서 감칠맛이 생긴다. 그 감칠맛에 중독되면 더 이상 사실과 조롱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신도가 돼 봐야 그 맛을 아는데, 아니 그 맛에 중독돼 봐야 신도가 되는데, 이게 비밀결사 집단의 구성원 같은 유대감과 끈끈함을 발휘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을 우리는 알지, 하는 뿌듯하고 충만한 결속감.

 

패러다임이 전복되고 기존의 가치가 전환되는 이 종말의 시대에, 그래서 난 최대한 마음껏 흔들리기로 했다. 내가 그다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닌데, 구태여 나의 지난 생각을 바꾸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다수가 서 있는 지평에 영혼을 맡길 만큼 나 자신에게 무심하지 않다면, 마음이 흔들리고 들썩일 때마다 자신을 들여다볼 일이다. 그렇게 나의 땅을 조금씩 넓혀서 나의 두 다리가 내 세계에 딛고 서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