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오판이었어

에난티오드로미아로 본 가세연 관찰기

아난존 2021. 11. 16. 22:08

 

나는 가세연을 왜 볼까? 가세연의 진행자들이 진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떨 땐 구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기 위해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유튜브가 무섭다, 표정을 완전히 감추기가 어려워 때때로 보여줘야 할 표정에 대응하기 위해 마음이 강제 동원될 때. 그렇게 진행자들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점점 동화돼 버린다. 첨엔 브랜드로 애국 마케팅을 했는데, 애국, 애국, 하다가 진심 그 세계에 빠져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자신의 팬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 세계에서만큼은 영웅이 돼야 하니까, 홍준표가 청년들의 지지에 진심으로 감격해서 변화된 것처럼.

 

삶의 어느 순간 완제품이 돼버린 사람들은 그 닫힌 모습이 보기 좋든 싫든 변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자의든 타의든 열려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란 걸 고통을 통해 알아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태도가 변하고 세계관이 바뀐다. 그럼 나는? 나는 신의 가호인지 장난인지, 입을 꾹 다문 상처 입은 조개마냥 20대 무렵 삶을 화석화시키고 싶었으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길게 살고 있는 덕에,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게 점점 많아지면서, 아무리 삶을 단순화시켜도 생각의 갈래가 나뉘고 연해지는 걸 막을 수 없게 됐다. 아아,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그냥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보기로 했다. 나는 삶에 순응하는 인간이니까.

 

그런데 현재의 나는 진보 방송을 그닥 시청하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핫한 방송 외엔 잘 안 듣는데, 이유는 그간 오랜 시간 시청해온 결과 이제는 특정 사안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 대략 짐작이 가서이다. 뉴스가 더 이상 새롭지 않으니 이 방송이나 저 방송이나 재방송 듣는 기분? 그래서 안 듣기 시작했다. 거기다 소리 지르고 화낼 때마다 드는 기이한 느낌은 덤.

 

그런 이유로 중립을 표방하는 정치인싸나 한판승부를 보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이젠 진중권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선 믿고 있었던 김성회가 오히려 포장을 하고, 기대도 안 했던 알맹이를 진중권이 말하네? 그게 신기했다. 현상을 본질로 오도하며 자신이 속한 진영을 방어하고 선전하는 게 패널들의 역할로 보이기에, 그나마 민주당을 비판할 때도 있는 열린 민주당의 김성회에게 신뢰가 갔다. 그렇게 김성회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득템한 진중권, 물론 오래된 비호감 인상이 한순간에 바뀔까만은 표정 말고 발언만 들으면 건질 말들이 꽤 있다. 진보 진영에서 아예 덮어버리는 것들을 누군가는 들춰야 균형이 맞는 거니까. 진보라고 순백의 천사들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그게 진보의 특징도 아니고.

 

그런데 지지자들에 의해 아이돌이 된 정치인들은 자신을 만들어진 이미지로 포장한 채 상징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자신의 본질을 잃고 정체성을 상실하고 끝내는 자아도 버리는 기괴한 일을 저지른다. 지지자들이 믿는 대로 보여줘야 해, 이런 강박증에 빠져 진짜로 연예인이 되면서 2D의 세상에 갇혀 버린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면 지지자들에게 죄를 짓는 거야, 그러니 그 믿음을 지켜줘야 해, 그렇게 스스로 상징화된다. 오 마이 갓! 살아 있는 생명체가 자발적으로 박제가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어쩌랴, 분에 넘치도록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절정의 순간에서 그 사랑을 잃을까 봐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을. 그래서 박제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어떻게? 자살하거나 자신의 자아를 파괴하거나.

 

칼 융의 에난티오드로미아 개념은 이렇게 곳곳에서 진행된다. 양이 다하면 극에서 음으로 바뀌고, 음이 다하면 극에서 양으로 바뀌듯 극과 극은 통하니까. 그러니 정의를 강렬하게 외치는 사람일수록 불의가 내 안에서 발견되면 그 불의를 폭탄 삼아 자폭해버릴 확률이 높다. 그것이 양의 세계가 음의 세계로 바뀌는 지점이다. 기존의 정의관을 지키기 위해 성찰하고 성장하기보단 그 세계를 끝내버리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린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세상이 흑백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면 오죽 편할까, 만은 그래서 기독교가 어떻게 자폭해 왔는지, 그리고 현재에도 어떻게 자폭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교훈을 주고 있지 않은가. 흑백의 세상이 2D를 벗어나면 촌스럽고 유치해지는 것이다. 현실의 세상은 올컬러에 3D인데 이걸 아무리 고품격 문자로 담고 영상으로 담아 봐야 2D인 것을. 그래서 2D3D화 되는 과정엔 항상 폭력이 뒤따른다. 촌스럽고 유치한 것을 성스럽고 고귀하다고 믿게 하려면, 그 비어있는 복잡하고 수상한 공간을 신념이란 허상으로 메꾸려면? 별 수 없다, 폭력이 동원될 밖에.

 

그래서 강력한 법, 강력한 금기, 강력한 세뇌가 필요하다. 더하여 2D가 편하고 익숙한 사람들은 익히 많은 이들이 앞서서 지적한 대로 자유가 두렵다. 두렵다는데 어쩔 것인가, 두려움만큼 인간을 재빠르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감정이 또 있을까. 대중이 항상 다수가 서 있는 땅으로 몰려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수가 되면 두려우니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일이 많아지니까.

 

다시 가세연으로 돌아가 보자. 김세의, 강용석, 김용호, 그 주요 진행자 셋은 목표와 성향이 달라서 그런지 서 있는 세계가 다 달라 보인다. 그들 간에는 교집합보다 여집합이 많아 보이고, 특히 지금 자숙 중인 김용호는 용병처럼 보인다. 용병이라 생각하고 서로 견제하고 조심하다가 거듭된 전투를 함께 치르며 생사고락을 나누다 보니 정든 관계? 그래서 이들 셋을 묶어 말하는 게 맞나 싶다. 김용호는 생방송 중에 강용석에게 왜 내 변호사 수임료를 돌려주지 않냐고 웃으면서 농담처럼 진심을 얘기해 강용석을 당황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런데 이거 아는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보다 조건 보고 결혼한 사람들이 이혼율 낮은 거, 배우자의 직업이 좋아서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의 외도를 이유로 이혼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것처럼 도덕적인 걸 바라지 않는 사람한테는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세연은 대놓고 돈을 얘기하고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강용석은 부동산 강의도 한다. 그리고 유명인이라면 가리지 않고 치부를 들추는데, 이는 시청자의 욕구를 만족시켜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서다. 가세연 채팅창에는 김용호 언제 돌아오냐는 댓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왜냐, 김용호에게 구독자가 바라는 건 그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유명인들의 숨겨진 흑막을 팍팍 벗겨줘서 쾌감을 주니까. 위선이 벗겨진 알몸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우스꽝스러워 재밌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후련한 감정은 그간 임금에게 부여된 권위가 파괴되는 걸 보면서 느끼는 해방감이다. 왕권신수설은 개뿔, 그런 감정.

 

가세연은 그런 개뿔 감정을 제대로 부추긴다. 여장과 분장을 수시로 하고, 길거리 제로투 댄스도 마다 않는 강용석과 김세의를 보면 그 성실성과 노력에 감탄한다. 그리고 강용석은 아빠가 이렇게 돈 번다.” 같은 말을 해서 팬들에게 솔직함으로 어필한다. 이들은 박정희, 박근혜 주제만 아니면 거침없이 욕망에 충성한다. 명품에 대단히 밝고 엘리트, 상류층, 고위직, 유명인에 집중한다. 이처럼 대중의 욕망과 일치하니 라이브 방송 실시간 시청자가 보통 3~4, 많을 땐 5만을 넘기도 한다. 그러나 상징을 상징으로 남겨두길 원하는 사람들은 상징 깨는 행위가 불편하다. 상징은 유연성이 없어서 작은 균열에도 쉽게 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세연은 이 지점만 꼭꼭 집어서 공격한다. 상징은 무슨 개~, 이런 감정을 너무 잘 파고든다.

 

나꼼수를 필요로 했던 시대가 지나니 멤버들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갔듯 가세연 역시 그럴 것이다. 그들이 주류에서 밀려난 한풀이로 애국 마케팅을 한다 해도 그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거야말로 인지상정이니까. 더구나 가세연은 자신들의 팬층을 의도를 갖고 정해놓은 방향으로 이끈다기보단 팬들이 조회수와 슈퍼챗으로 이들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점이 나꼼수와의 가장 큰 차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나꼼수는 멤버 간의 주체적 의지가 나꼼수의 정체성을 결정했다면, 가세연은 객체적 의지 즉 팬들의 욕구와 욕망이 가세연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