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와 긴 대화를 하지 않는다. 엄마한테 내 언어가 외국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래서 되도록 엄마 세계의 언어로 번역해서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 사람은 나한테 이익이 돼, 이 일은 나한테 돈이 돼, 이런 식으로…, 우리 엄마에게 ‘나’는 배운 사람이고, 배운 사람은 우리 사회를 사는 데 유리한 사람이다. 어쨌든 나는 엄마 말을 번역하는데 엄마는 내 말이 번역이 안 되니 내가 엄마의 언어를 써야 한다고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다. 내가 내 언어를 시전하면 어김없이 감정의 충돌이 따라왔고 그 후유증이 컸으므로 웬만해선 내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모성애가 없다거나 나를 잘 돌봐주지 않았다거나 그건 아니다. 오히려 과하게 나를 위해 집중하고 헌신하셨다. 그리고 나도 어느 때까진 그에 대한 보답으로 돈 잘 버는 딸이 되려고 애썼다. 그게 엄마에겐 가장 큰 보상이니까, 그리고 나도 그 세계에 동참하는 것이 편했다. 사유가 비현실적이고 논리회로가 자주 고장 나는 ‘나’ 같은 사람은 그나마 일상이 단순해야 심리적으로 안정되니까, 아마도 사고 없이 쭉 살았다면 지금도 나는 그런 삶을 계속 살고 있었을 것이다. 수입이 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여유 있는 지출을 위해서라도 적절한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활.
그래서 易地思之(역지사지),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나는 이 말이 갖는 둔감성이 싫다. 왜냐, 그 입장이라는 게 거리 유지가 멀찌감치 되는 타인처럼 되게 일반적인 사회윤리 영역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살인 안 돼, 도둑질 안 돼, 폭력 안 돼, 욕설 안 돼, 갑질 안 돼 등등 그런 보편 도덕 말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관계로 들어가면 오히려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상대에겐 폭력이 된다. 내가 불통에 유독 관심을 갖는 이유도 우리 가족은 각자 사용하는 언어가 다 다르기에 그렇다. 상대의 언어를 웬만큼 번역할 자신 없이 대화하면 반드시 불통의 견고한 벽을 만나게 된다. 남이면 불통의 벽 앞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간 켜켜이 누적된 오해의 구멍까지 숭숭 나 있어서 그 구멍으로 상처가 굳어 단단해진 원망의 돌멩이가 날아오기 일쑤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인가? 나는 엄마와의 소통에서 사용하던 번역기를 버리면서 상당히 긴 시간 혼란과 허무의 늪에 빠져 허덕였다. 모든 생각의 꼬리는 항상 나의 어리석음이란 과녁에 꽂히니 그게 참 괴로웠다. 그러나 자책도 한두 번이지, 습관 되면 고인 물이고, 고인 물은 썩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집중해봤다. 나는 어떤 사람인 거지? 내가 나한테 오지게 관심이 없었구나, 처음 만난 장애는 그거였다.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나는 개인주의가 편하고 평등보다는 자유에 기울어져 있다. 다만 나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남의 자유를 지켜줘야 한다는, 나만큼 너도 존엄체야, 이 전제를 보장하는 평등을 좋아한다. 예컨대, 내 의지로 자연인을 선택하면 인정, 사회가 밀어내서 자연인이 되면 못 인정, 나의 자율적 선택으로 자살하면 인정, 사회에서 배제당해 자살로 몰리면 못 인정, 이런 식으로 매사 스스로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고, 여기서 평등이란 누구나 자신의 선택에 근접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평등의식은 개별적 자유 없이 성립하지 못한다.
얼마 전 내가 들은 얘기, 60대 딸과 90의 엄마가 함께 사는데 이들은 고추조림을 각자 해먹는다고 한다. 딸은 살짝 조려서 아삭하고 심심하게, 엄마는 푹 조려서 말랑하고 짭짤하게, 서로 상대의 식성에 관여하지 않고 자신이 먹고 싶은 대로 직접 조리해 먹는다는 것이다. 감동! 감탄! 자신의 입맛에 그토록 정직하다니, 뭘 좋아하는지 수시로 잘 모르고, 어디서 화를 내야 하는지도 때때로 잘 모르는 ‘나’ 같은 인간에게 그런 섬세한 행동은 경이롭다.
상대주의는 이들 모녀처럼 상대의 입맛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동시에 타인의 세계도 지켜주는 것이다. 아, 상대는 나랑 입맛이 이런 면에서 다르지, 이걸 잊지 않는 것. 그런데 그간 나는 일방주의와 쌍방주의를 혼동해서 일방주의도 상대주의라고 생각해왔다. 그건 타자에 대한 배려일 순 있어도 나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던 거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 그만큼 내 의지가 반영 안 됐기에, 당연히 원하는 바가 내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잘못돼도 화가 나는 지점이 별로 없었던 거다.
그러니까 역지사지는 쌍방적 상대주의를 전제하지 않으면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방향이 ‘나’를 향해 있을 때 ‘나’는 파괴되는지도 모른 채 망가지는 것이다.
'살아보니 오판이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난티오드로미아로 본 가세연 관찰기 (0) | 2021.11.16 |
---|---|
나는 나를 불신한다 (0) | 2021.11.14 |
관계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면... (0) | 2021.09.07 |
죽음은 웬만하지 않다 (0) | 2021.09.03 |
나의 정치 이력서 (0) | 2021.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