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말이 없었던 사춘기 때의 ‘나’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장담하건대 30초 만에 손절각이다. 왜? 말이 너무 많아! 쓸데없는 정보를 순식간에 마구 방출하는 나를 발견할 때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을까 궁금해진다. 원했던 건 아니지만 한때 나의 트렌드였던 신비주의 버리고, 이 또한 바랐던 건 아니지만 먹물 이미지 버리고, 시간 아까운 줄 모르며 수다 떠는 동네 아줌마가 된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증.
불통이 당연시되는 사회, 단절이 일상화된 사회에 나는 불안감을 넘어 공포심을 느낀다. 저 사람과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고 느낄 때 드는 오싹한 소름, 동시대에 살면서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데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을 때 드는 이질감을 나는 잘 견디지 못한다. 이 부분에 대해 너무 예민해서 그런지 그럴 때마다 나는 속도 미식거리고 토할 거 같다. 그렇게 해서 생긴 트라우마가 내 사유를 자꾸 공회전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생존전략이 안 봐도 괜찮은 사람이면 지나가는 풍경이라 생각하고, 계속 봐야 할 사람이거나 보고 싶은 사람이면 내 생각을 자꾸 상대에게 펼쳐놓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이런 생각은 과거의 내가 이러저러해서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당신을 이해하고 있다, 지금의 당신이 미래의 당신이 아니어도 괜찮다, 어쩌면 아닌 게 더 낫다, 나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있으니 당신도 나를 이해해 달라. 아하! 그런 거였다! 이해받고 싶고 오해받기 싫은 마음, 드디어 내가 사회성을 장착하게 된 것인가.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많은 정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차겠으나, 지금의 나는 말 없는 사람이 불편하다. 침묵이 신뢰를 동반하지 않는 시대에 살기에, 그 침묵의 태반은 기회주의에 이용되기에, 그 태반의 침묵이 구밀복검의 칼로 사용되는 것을 봤기에, 지금의 나는 과묵한 사람을 보면 음흉해 보이고 음습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내 경험이 보편적 진리라는 얘긴 당연히 아니다. 왜 ‘나’란 인간이 뻔히 불리할 줄 알면서도 자꾸 ‘나’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가에 대한 자각적 고찰일 뿐.
두려움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나는 불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tmi를 택했다. 그러니 선택에 대한 부작용은 감수할 수밖에 없고, 상대가 어느 부분에서 오해할지 모르면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서로의 경험치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당연히 오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당연함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 오해를 차근차근 풀어줄 여유가 지금의 우리에겐 없다는 거, 그래서 오해를 차곡차곡 쌓아 견고한 단절의 벽으로 선긋기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살면서 소통을 욕심내는 게 어쩌면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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