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오판이었어

왜 나는 tmi가 됐을까?

아난존 2022. 9. 18. 16:17

 

지독히도 말이 없었던 사춘기 때의 가 지금의 를 본다면 장담하건대 30초 만에 손절각이다. ? 말이 너무 많아! 쓸데없는 정보를 순식간에 마구 방출하는 나를 발견할 때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을까 궁금해진다. 원했던 건 아니지만 한때 나의 트렌드였던 신비주의 버리고, 이 또한 바랐던 건 아니지만 먹물 이미지 버리고, 시간 아까운 줄 모르며 수다 떠는 동네 아줌마가 된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증.

 

불통이 당연시되는 사회, 단절이 일상화된 사회에 나는 불안감을 넘어 공포심을 느낀다. 저 사람과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고 느낄 때 드는 오싹한 소름, 동시대에 살면서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데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을 때 드는 이질감을 나는 잘 견디지 못한다. 이 부분에 대해 너무 예민해서 그런지 그럴 때마다 나는 속도 미식거리고 토할 거 같다. 그렇게 해서 생긴 트라우마가 내 사유를 자꾸 공회전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나온 생존전략이 안 봐도 괜찮은 사람이면 지나가는 풍경이라 생각하고, 계속 봐야 할 사람이거나 보고 싶은 사람이면 내 생각을 자꾸 상대에게 펼쳐놓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이런 생각은 과거의 내가 이러저러해서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당신을 이해하고 있다, 지금의 당신이 미래의 당신이 아니어도 괜찮다, 어쩌면 아닌 게 더 낫다, 나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이해하고 있으니 당신도 나를 이해해 달라. 아하! 그런 거였다! 이해받고 싶고 오해받기 싫은 마음, 드디어 내가 사회성을 장착하게 된 것인가.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많은 정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차겠으나, 지금의 나는 말 없는 사람이 불편하다. 침묵이 신뢰를 동반하지 않는 시대에 살기에, 그 침묵의 태반은 기회주의에 이용되기에, 그 태반의 침묵이 구밀복검의 칼로 사용되는 것을 봤기에, 지금의 나는 과묵한 사람을 보면 음흉해 보이고 음습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내 경험이 보편적 진리라는 얘긴 당연히 아니다. 란 인간이 뻔히 불리할 줄 알면서도 자꾸 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가에 대한 자각적 고찰일 뿐.

 

두려움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나는 불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tmi를 택했다. 그러니 선택에 대한 부작용은 감수할 수밖에 없고, 상대가 어느 부분에서 오해할지 모르면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서로의 경험치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당연히 오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당연함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 오해를 차근차근 풀어줄 여유가 지금의 우리에겐 없다는 거, 그래서 오해를 차곡차곡 쌓아 견고한 단절의 벽으로 선긋기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살면서 소통을 욕심내는 게 어쩌면 망상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