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오판이었어

나의 정치 이력서

아난존 2021. 8. 27. 13:44

 

 

나는 정치하는 인간들이 싫다. 그래서 20대 때 나의 정치관은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자, 보수. 기득권을 뺏으려는 자, 진보. 이렇게 구분했다. 그렇다! 나는 정치 혐오자다. 그래도 투표는 항상 기득권을 뺏으려는 자들 쪽에 일관되게 던졌다.왜냐, 내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거의 유일한 체감 행위인 투표, 그것만큼은 꼭 행사하고 싶었고, 이왕이면 억울한 사람이 적은 사회가 그나마 살 만한 사회니까, 또 이미 많이 누린 사람들은 양보해도 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취미활동과 생존활동은 그 무게가 다르니까.

 

그러다 나꼼수를 알게 됐고, 정치는 일상이란 구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정치 얘기를 저렇게 희화시켜서 낄낄대며 해도 괜찮네? 심각하고 진지하고 추악한 것만이 정치가 아니네? 이렇게 나꼼수가 선도한 정치의 패러다임 전환은 나를 선거일 외에도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첫사랑은 김어준의 몰빵론으로 박살이 났다. 지난 총선에서 열린 공천이 주는 획기적인 시도를 지지해 열린민주당에 가입했던 나는 매일같이 당원 게시판에서 흐느끼는 곡소리를 들어야 했다.

 

김어준에 대한 애증으로 당원 게시판에서 공박이 이어지던 그 당시 내가 깨달은 것, 정치적 대의니 명분이니 하는 것은 대중의 관심과 인기에 비하면 참 허접한 거구나, 였다. 김어준은 멋지게 몰빵론을 성공시켰고, 열린민주당은 출발하면서 기세 좋게 찍었던 지지율 두 자리가 아련하게도 비례 의석 세 자리 획득에 그쳤다. 누굴 탓하랴, 이것도 실력 차이지, 그런 거다! 이미 기득권이 된 사람이 뭐하러 기득권을 뺏는 쪽을 편들겠어, 당연히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쪽에 서겠지, 중립은 개뿔, 늑대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배부르면 하이에나가 되는 게 인지상정인가 보다. 일단 배가 불러보면 배고픈 시절이 더 두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져봤으니까, 느낌 아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몰빵론이라니, 개인주의자인 나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의 정치적 선택을 왜 타인에게 맡기는 거지? 그런 맘으로 평소 안 듣던 정치 시사 방송들을 두루두루 듣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렇게 듣기 어려웠던 방송들이 몰빵론 이후에는 들을만했다. 확실히 몰빵론은 나의 편협함을 각성시킨 사건이었다. 그러다 또 깨달아버렸다! 이런 젠장, 여기나 저기나 정보가 다 편향돼 있네? 확증편향의 생산과정과 유통 서비스를 날마다 확인하며 내가 도달한 세상, 그건 경이롭게도 우리가 지금 위험하다는 거였다. ? 화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울분을 터뜨릴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정봉주가 김어준과 화해하는 거 보면서 나는 열린민주당을 탈퇴했다. 그들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다르다는 건 확실하다. 그들에게 정치는 게임처럼 보인다. 이기면 신나고 져도 사는 데 지장 없고, 어찌 보면 정치가 취미활동인 기득권이 못 된 내 탓일 수 있다. 코로나로 어려운 이 시국에도 상위 20%는 삶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국과 어려움을 같이하는 하위 80%, 그러니 여전히 정치가 생존활동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방탄유리 안에서 전쟁터인 밖을 내다보듯,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래서 진영논리에 갇히고 싶지 않다. 기득권의 취미활동에 나의 생존활동을 등치시킬 순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것보다는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리고 기득권은 뺏는 게 아니라 없애는 거라고 아직도 믿고 싶기에,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이 위험사회는 결코 안전사회로 나아갈 수 없기에, 이런 생각을 가진 나는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초현실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살아보니 오판이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나를 불신한다  (0) 2021.11.14
역지사지와 상대주의  (0) 2021.09.18
관계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면...  (0) 2021.09.07
죽음은 웬만하지 않다  (0) 2021.09.03
책 빌리러 갔다가...  (0) 2021.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