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혐오의 작동원리

아난존 2019. 4. 17. 06:46




우리 사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만 그런 것도 아니고, 혐오는 인류사에서 항상 작동해 왔다. 그런데 왜 요즘 그 말이 유독 문제가 되고, 또 관심을 끌고 하는 걸까? 마치 오늘날 현시점에서만 우리 사회가 혐오를 실핏줄 삼아 움직이는 거대한 괴물 같다는 식으로 바라보는데, 그럴 리가, 외국이라고 다르지 않고 과거라고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역시 민주주의다, 평등이 기본가치라고 설정해놓으니 그간 당연시했던 멸시와 천대가 어느 순간 혐오라는 이름으로 사회문제가 돼 버린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여전히 믿고 싶은 어르신들은 별거 아닌 백성들이 높으신 분들과 맞장뜨는 현실이 몹시 거슬리고, 태어난 계층이 신분이라고 믿고 싶은 기득권층은 공정한 경쟁 운운하는 흙수저들이 못내 불쾌하고, 죽어라 구르고 엎드리고 참아가며 겨우겨우 지금의 위치에 올라간 중산층들은 설렁설렁 사는 것처럼 보이는 하층민들이 다 같이 잘 살자고 덤비는 게 미치도록 싫다.

 

그러니 진짜 문제는 평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신분제인데 무늬만 민주주의라는 거다. 귀속지위가 차라리 편했는지도 모른다. 안되면 신분 탓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이젠 신분 핑계도 안 되고, 수저 색깔론으로 위로해보지만 그러기엔 집집마다 지나치게 교육열이 높아서 교육의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어찌나 몰빵을 해대는지 더이상 못 배운 부모 탓 가난한 환경 탓할 시대도 아니다.


분노가 위로 향하면 저항이 되지만 아래도 향하면 혐오가 된다. 어쨌든 대충 무늬만 민주주의라도 제도가 평등사회를 작동시켜 놓으니, 시시때때로 갑과 을이 요동친다. 직장에선 을이 소비자일 땐 갑이 되고, 권력자인 갑이 선거철엔 을이 된다. 신분제처럼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다 보니, 을로서 당한 약자의 억울함을 갑일 때 강자가 되어 휘두른다. 이렇게 갑과 을을 한 사람이 모두 겪다 보면, 편법이라도 좋고 불법이라도 상관없으니 절대 을이 되고 싶지 않아진다. 그러니 이를 악물고 갑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을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밟을 수 있을 때 밟아야 한다.

 

짐승의 본성을 가진 생명체에게 인간은 짐승이 아니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다. 차라리 짐승처럼 살라고, 수사자는 무리를 힘과 공포로 다스리고, 가장 강한 수사자가 암사자를 다 차지하고,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포식자로서 살라고, 그러면 속 편할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수사자들끼리 서열 잡고, 약자들은 알아서 조아리는 장엄한 자연질서가 지배하는, 그런 세렝게티 초원에서는 혐오의 감정 따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랴, 우리 인간은 그게 안 되는 것을, 평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온갖 마음이 내 안에서 극렬히 부대끼면서도, 결국 평등 가치를 대놓고 부정하지 못하는, 우린 그런 모순적이고 이상한 생명체인 것을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