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촛불집회의 뜨거움과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정권만 바뀌면 적폐청산 되는 줄 알고 날이 추울수록 더 출석했는데, 2017년 정권이 바뀌고 2019년이 돼도 적폐청산은커녕 적폐의 고리가 얼마나 두껍고 견고한지만 알게 되었다. 이래서 안 되는 거였구나, 이렇게 얼기설기 거미줄 같은 그물망 속에 우리 사회가 움직이고 있었구나, 놀랍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대체 뭐가? 뻔한 거 아녔어?
아니다, 악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나눠 갖는 이익 공동체들이야 그러려니 했다. 그넘들은 본시 악한 것들이니까, 그넘들은 본시 자신들이 초법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인종들이니까, 그넘들은 세상이 부조리하고 불공평할수록 자신들의 위치가 공고해지는 걸 알고 악용하는 탐욕에 먹힌 좀비들이니까. 그러니 그넘들을 회개시키는 방법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알게 하고 잘못만큼 처벌받게 하는 거라고, 그것만이 평범한 다수가 그나마 안전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악을 모른 척해온 평범한 다수가, 구석구석 악이 실핏줄처럼 퍼져가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악에 굽신거렸던 수많은 민중이, 이렇게 저렇게 적폐의 톱니바퀴에 옷자락 하나 신발 끈 하나 정도씩 물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싶은 이 평범한 다수는 크게 이익 본 것도 없으면서 적폐를 외면해 버린다.
드라마 <열혈사제>에서는 이러한 현실 상황, 즉 구조적 적폐 상황, 그러니까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악에 얽혀 있는 상황을, 정의의 사도 한 사람이 하나씩 둘씩 감화시키며, 나도 악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누굴 손가락질해, 잘못 건드리면 나도 걸리는데, 하던 사람들을 각자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드라마니까, 물론 그렇다, 드라마니까, 그러나 이처럼 사람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인식이 또 있을까? 21세기에도 계몽주의가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놀라운 구성력이다.
현실의 삶이 충분히 고단한 우리는 정의의 사도는 고사하고, 그건 아무한테나 바랄 것이 아니니 패스하고, 그냥 정의의 사도가 눈앞에 있어도 그 역할이 나한테 튈까 봐 멀리한다. 거기에 더해 가짜 정의의 사도를 몇 번 겪다 보면, 그냥 정의 어쩌고 하는 것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 그래서 진보가 욕망을 드러내면 더 욕먹고, 남들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미래를 위해 그러면 더 역하다. 그 안의 탐욕들, 그 안의 왜곡된 욕망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기 때문에, 미화와 가식과 포장이 더 역겨운 것이다.
그러니 어쩌자고? 일단 가짜 정의의 사도들은 무시하고, 그들을 만나면 비켜 가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들의 영향력은 위력적이지도 장기적이지도 않으니까, 굳이 맞붙어 싸우면서 엄한 데 에너지 소모할 필요 없다. 문제는 다수의 보통 사람들, 즉 다수에 속해서 보통 사람인 우리 민중들이 스스로 적폐의 톱니바퀴에 끼인 옷자락, 신발 끈 등을 아깝다 말고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까짓 옷이나 신발 등은 다시 사면 그만이다, 더 위험한 상태가 되기 전에 끊고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당장의 손실을 초래하고 자신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가혹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자신만 보이는 거울의 방에 가두고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덜 가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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