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윤지오가 점화시킨 헬조선의 아수라장

아난존 2019. 5. 7. 23:07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란 타이틀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윤지오, 그녀는 자신이 유일한 증언자일 뿐 유일한 목격자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그러니 자신 말고 다른 여배우들도 증언에 동참해달라고 했다. 이는 힘과 권력 앞에서 한없이 순해지는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울림이었다. 그래서 이후 그녀의 행보가 다소 요란스럽고 다소 관종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냥 묻힐 뻔한 장자연 사건을 다시 주목받게 했다는 것만으로 윤지오의 행보는 가치가 있었다. 그녀의 과한 행동은 그녀가 대중의 인기를 갈구했던 연예인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랬던 그녀가 고소를 당한 데다 캐나다로 출국마저 해버리는 통에, 이제는 애초에 의도적인 사기꾼이었냐 그냥 심리적으로 불안한 관종이었냐, 하는 의심까지 받는 처지다. 설상가상으로 진보진영의 스피커들을 흠집 내고 가는 바람에 극우 유튜버들의 극찬을 받는 인물이 돼 버렸다. 윤지오 덕분에 진보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논리가 종횡무진 유튜브 보수들의 만찬 재료가 되고 있다.

 

대체 무슨 일들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1인 미디어 시대에 차고 넘치는 자료들이 촘촘한 증거물이 되어,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을 넘어 무작위로 총질을 해대는 무기가 되었다. 죄의 경중보다 중요한 건, 너라고 죄 없냐, 너라고 완벽하냐, 하는 우린 모두 원죄 있는 인간이야 하는 프레임이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우리는 스스럼없이 공범이 되어도 좋은가, 이대로 다 같이 너나 나나 도긴개긴이지, 그러면서 대충 과거를 잊는 게 맞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윤지오 덕분에 극우 유튜버들이 신났다. 윤지오가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마저 비난한 탓에, 그러고 출국한 탓에, 그야말로 그녀를 도와준 사람들이 세상 한심한 사람들로 전락했다. 진보는 감정에 호소하는 저렴한 선동가라고 낙인찍기 좋은 사건이 터진 것이다. 우리나라 보수들은 진보의 위선이 징그럽게 싫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게 천한 것들이 감히 자신들과 맞먹으려고 하는 그 같잖은 태도이다.

 

보수는 진보의 욕망이 몹시 거슬린다. 그래서 보수에게 진보는 천하의 몹쓸 위선자로 보인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탐욕에 한없이 순정한 입장에선 일반적인 욕망과 욕구가 구분이 안 되니까. 기본 욕구 충족은 보수냐 진보냐 같은 이념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음이 이해 안 될 것이다. 불의와 불합리에 대한 분노는 양심에 대한 문제일 뿐, 왜 이것이 정치 진영의 문제가 되는 것인지, 원칙과 상식에 따른 일 처리는 진영의 문제가 아닌데, 왜 우리 사회는 모든 문제가 진영 논리로 움직이는 것일까.

 

대중 다수는 그저 덜 피로한 사회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는 사회에서 살아야 덜 힘드니까, 인간은 마냥 동물 같지 않아서 밥만 먹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보니 억울함이 적은 사회에서 살아야 덜 위험하니까, 그래서 적폐를 청산하자 하는 것이지 이것은 진영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진보니 보수니 같은 낡은 이념의 무기로 혐오를 조장하고 증오를 증폭시키는 일은 그만두자. 그러니 이제 그만 자신의 이익과 감정에 위배된다고 상대를 헐뜯는 일 좀 그만하자. 그렇게 해서 다가올 세계가 정녕 두렵고 무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