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우리나라에서 ‘보수’는 뭐고 ‘진보’는 뭐길래, 보수는 진보더러 ‘좌빨’이라 하고 진보는 보수더러 ‘수꼴’이라 할까, 이 혐오의 지칭어들은 언제까지 유통될까?
국가의 기능이 마비됐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상층부는 거의 와해된다. 이 시기의 교훈으로 약육강식이 곧 근대화이며 선진화이고, 근대화는 서구화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의 기원이 된다. 이들에게는 서구화를 동양에서 유일하게 성공시킨 나라가 일본이므로 친일이 곧 매국이란 등식은 좀 억울하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하게만 보였던 일본이 미국한테 무참히 깨진다. 이미 약육강식이 철저히 체화된 일본은 이후 가장 친미적인 국가로 거듭났고, 그러니 우리 보수는 당연히 친일에서 친미로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래서 보수는 세상의 운영 이치인 약육강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을 매국노니 기회주의자니 비난하는 것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질투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진보의 스펙트럼은 보수진영보다 훨씬 다양하다. 일단 일제에 저항한 독립군과 민족주의 진영이 교과서적 이념상으론 보수인데 이들이 우리나라에선 진보의 기원이 된다. 그러니 출발부터 우리는 사전적 의미의 보수냐 진보냐로 구분되질 않는다. 그다음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했던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 지지자들이 진보의 한 축이다. 이들은 단독정부 수립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에서 대부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남한에서는 친북성향의 주사(주체사상)파가 이들의 계승자로 오인된다. 이로 인한 운동권 내의 이념논쟁은 굉장히 복잡하니 여기선 패스~. 그리고 노동자, 농민 등 소위 민중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지향 세력이 진보의 또 다른 축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진영의 분류가 2019년도에도 통용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일례로 노동자 계층만 보더라도 하나의 단위로 묶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에는 누구를 노동자라고 해야 할지도 애매하다. 고임금의 숙련기술자도 있으며 저임금의 전문지식인도 있으니 과거 개념으로는 민중을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럼 정당 지지 별로 구분하면 될까? 자한당, 바미당 지지는 보수고, 민주당, 정의당, 평화당 지지는 진보? 글쎄다, 그게 안 되니까 상대를 모함하는 좌익 빨갱이, 수구 꼴통이란 말이 넘나들며 대중에게 먹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정당을 헤쳐 모여 시켜서 다시 조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한당은 기존의 기득권을 신분제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이 독재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공정한 경쟁이란 무한경쟁이 아니라 출생과 동시에 제약이 있는 조건부 경쟁이다. 미국 사회는 아직도 인종차별과 빈부격차가 심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계 패권국이다. 일본 사회는 부모 직업이 자식에게 세습되며 획일화된 일본인 모습이 가끔 섬뜩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이다. 그리고 가장 친미적인 나라이다. 그러니 자한당이 미국과 일본을 따라한다고 해서 이상한 게 아니다. 그게 그들에겐 지극히 모범적인 것이다. 이들은 대놓고 이익 단체인 만큼 나눌 파이가 있는 동안은 끈끈하고 의리도 돈독하다. 다만, 바미당처럼 배신하고 뛰쳐나가면 가차 없이 응징한다. 그러다가도 다시 돌아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파이의 크기만큼 살뜰히 예우해 준다.
민주당은 스스로 자생해온 게 아니라 자한당의 대항마로 존재해왔다. 그래서 자한당의 부패 정도가 심할수록 그 정당 가치가 높아진다. 그러다 보니 자체적으로 빛나는 민주당만의 색깔 없이 보수가 저질러 놓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시기마다 지지도를 결정한다. 그런 만큼 특권을 누리지만 자한당처럼 당당하게 요구하지는 못한다. 그런 만큼 이들의 자녀들도 대체로 미국 유학생이지만 한국의 교육 현실도 자한당보다는 조금 더 생각한다. 그래서 보수로부터 위선자 소리를 듣는다. 자한당이 어떻게든 너희나 우리나 도긴개긴이란 프레임으로 정치권 이미지를 교정 불가능한 동네로 고착화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흙탕물에서 같이 뒹굴었는데 흙이 조금 튀었다고 해서 너희가 백설공주는 아니지 않냐 하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가 백성들에게 잘 먹히는 통에, 민주당은 같은 편에게서 적폐가 발견되면 화들짝 도망가버려 의리 없어 보이기도 한다.
정의당은 본인들이 작은 가슴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서 남을 품기 어렵다는 유시민의 예전 설명대로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선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서 타자에게 공격적이고, 피해의식으로 인한 방어기제가 날카롭게 서 있다. 따라서 외연 확장 자체가 이들에겐 정당 활동의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본인들의 기지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일에 훨씬 더 공을 들인다. 그러다 보니 정의당을 거쳐 간 사람들은 다시 이들을 지지하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이들이 가리키는 정의의 영역이 너무 좁다는 것인데, 그래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입진보란 비난을 받는다.
바미당과 평화당은 본류에서 먹이를 찾아 흘러나온 지류인 만큼 정치권의 지형도에 따라 얼마든지 헤쳐 모여가 가능한 정당이니 굳이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이들의 고민은 사적 권력 연장인데 이게 요즘 잘 안 돼서 돌아올 총선이 걱정이다. 그래서 이들은 캐스팅보트의 역할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일에 매진한다.
그래서 우리 시민들은 차선이나 차악을 선택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물론 차선과 차악에 대한 생각이 다르니 그에 대한 선택 역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지나친 경쟁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진보가 우세할 것이고, 약육강식의 섭리에 충실한 사람이 많으면 출생으로 신분이 세습돼야 한다는 보수가 우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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