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통을 매우 싫어한다. 전형적인 갈등회피형에 타인과의 거리 유지를 미덕으로 아는 인간, 그래서 누군가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그러라고 빌어주고 싶다. 그렇게만 살 수 있으면 오죽 좋으랴, 그런데 이제 나는 그럴 수 없게 됐다.
고통 속에서 감사하는 법을 알아버렸기에, 상처의 깊이가 이해의 깊이와 비례한다는 걸 알아버렸기에, 젠장, 이제 나는 글렀다. 타인의 눈물에서 아픔을 전달받는 인간, 슬픔의 밑바닥엔 절망이 아닌 분노가 있어야 한다는 걸 외면하지 못하는 인간, 나는 그런 구시대적 인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결국 나는 그런 오래된 유물 같은 구식 유형이었다.
100년 전의 니체에게서도 2000년 전의 예수에게서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그런 구형이다. 먹방이 싫고 예능프로가 지루한, 미소보다 눈물을 믿는, 나만 구원받기를 원치 않는 인간, 다수의 불행으로 소수의 행복이 유지돼선 안 된다고, 그런 구조에서 소수에 편입되면 안 되는 거라고, 흔들리면서도 결국은 그렇게 믿고마는, 나는 그런 구시대의 화석 같은 인간인 것을.
그러니 어쩌랴, 우주를 정복하고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따뜻한 심장을 가진 미래가 온다 해도, 우물쭈물 진화하지 못하는 인간들과 노닥노닥 고통을 나누며 그렇게 살밖에, 우물 같은 상처의 깊은 물에 무시로 던져지는 돌멩이를 온몸으로 품어서 진주를 만드는 조개처럼 그렇게 인내하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살밖에.
'소통과 관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담비에 환호하는 심리 (0) | 2019.03.30 |
---|---|
계란으로 바위 치기의 비밀 (0) | 2019.03.29 |
근대의 종말을 고한 트럼프 (0) | 2019.03.13 |
소소한 적의에 대하여 (0) | 2019.03.10 |
약자라서 유리한 것들 (0) | 2019.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