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악보다 사람을 더 절망하게 만드는 건 일상의 악이다. 뻔한 교통상황에서 울려대는 무개념 클랙슨 소리처럼 사람을 욱하게 만드는 소소한 악들, 대체 왜들 그럴까? 촛불집회에 모여 한마음이 되는 건 어렵지 않다. 때맞춰 정유라가, 돈 있는 부모도 실력이란 조롱으로, 가뜩이나 헬조선의 수저론에 맘 상해 있던 학부모와 학생층을 광화문으로 밀어내면, 그런대로 다수는 대의명분에 섞여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규모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일상에서 정의롭냐, 그건 아니다. 그중에는 무능하고 고약한 직장인도 있을 거고, 가족에게 화풀이하는 비겁한 소시민도 있을 거고, 종업원에게 거들먹거리는 같잖은 손님도 있을 것이다. 약자끼리 물어뜯도록 세뇌하는 사회구조에 길이 든 사람들, 그래서 자신보다 더 약자를 보면 강자에게 박박 기었던 분노가 울컥 치밀어 약자에게 그대로 화풀이하는 나약해서 못된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이 더 무섭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라 우리 사회가 너무 무섭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냐, 하면 그냥 도처에 널려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 교사같이 대개의 고용 형태가 계약직인 경우, 고용이 불안정한 만큼 수평적인 교사 간에도 관계가 폭력적이다. 물론 고용이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조직은 예외다. 또 간호사 ‘태움’이 의료계의 약자인 간호사 세계에서 일어나듯이 집단 폭력은 대체로 특정 공동체에서 가장 약자층에서 발생한다. 예부터 시집살이한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시킨다는 속담이 있듯이, 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약자인 여성끼리 적대적 관계여야 하니까.
그래서 어쩌자고? 우리 약자들이여, 소시민들이여, 제발 그러지 말자. 물론 우리 대다수는 알고 있다. 강자의 갑질이 상대하기 훨씬 간단하다는 걸, 눈에 보이는 지배자를 욕하기는 쉽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일상의 악들, 큰 폭력 밑에서 소소한 이익을 누리는 작은 폭력들과 싸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어쩌자고? 나는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보다 겸손할 수 있다. 금수저로 태어나 출세한 강자일수록 겸손을 배울 기회가 없다. 나는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보다 공감력이 클 수 있다. 위만 보며 달려온 강자일수록 아래 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른다. 나는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보다 자율적일 수 있다. 권력층에 매달려온 강자일수록 권력의 노예가 되기 마련이다. 나는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보다 독립적일 수 있다. 사회적 지위가 곧 자신의 정체성인 강자일수록 자신의 본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 약자들이여, 강자에게 참지 마라, 그건 약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소시민들이여, 권력자에게 양보 마라, 그건 소시민의 예의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겸손하지 않으며 공감력도 없고, 자율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뭐가 무서워 강자들을 두려워하는가? 그런 강자들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겸손하고 공감력도 있으며, 자율적이고 독립적일 수 있는 약자들이 하찮은 강자들을 동경하고 강자들의 횡포를 용인하는 것,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가장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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