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소소한 적의에 대하여

아난존 2019. 3. 10. 21:04




예전의 나, 그러니까 20대까지도 나는 사람들의 적의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배려심이 넘치는 다정한 아이였냐, 그래서가 아니라 내 자족적인 세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끼리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고 괴롭히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는 걸 잘 몰랐다. 특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시기라, 내가 왜 사람인 건지, 대체 사람이란 게 뭔지, 불평등은 왜 존재하는지, 세상 곳곳에 고통이 존재하는데 누구는 행복해도 되는지 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에 탐닉해 있던 터라, 막상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이 시기 가장 많은 시간을 사람보다는 책과 보냈던 것도 실제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저자들은 정제된 사고와 다듬어진 어휘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해답을 구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의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쓸모없었던 것이다. 소소한 적의는 공기처럼 우리 삶에 밀착된 거라 그것을 굳이 정의할 개념조차 없는 거였다.

 

그래서겠지만, 이제 21세기 한국에서는 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혼자서 노는 방법들이 발달하고 있다. 남에게 피해 주지도 않고 나도 피해받지 않는 최적의 형태란 혼자 놀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20년 전에도 여행 동호회 사람들이 가장 편하다던 대학 동창이 있었고, 드라마 폐인 모임이 가장 재밌다던 대학원 후배가 있었다. 지금에야 흔한 관계지만 그때만 해도 자주 보는 사람들보다 어쩌다 보는 사람들, 또는 한 번 보고 마는 사람들이 더 편해서 좋다는 심리가 낯설었다. 내가 원하는 수위만큼만 나를 드러내면 되는 관계, 작년 성탄절 기사에는 크리스마스이브 그날 처음 만나 함께 노는 모임들이 소개됐다.

 

소소한 적의를 피해 선택한 방법들, 혼자 놀거나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과 놀거나, 그런 관계에서는 소소한 적의가 잘 발생하지 않으니까, 표면적인 관계에서는 호의가 앞서니까, 짧은 관계일수록 본전 생각날 일 없으니까, 그만큼이나 우리 인간의 바닥은 참 얕은 것이다. 모두 그런 건 아니라고 해도 다수가 그러면 사회 주류 분위기가 그렇게 된다. 그래서 나쁜가?

 

특별히 나쁠 건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소소한 적의를 피하는 최적의 방법이라면 나쁠 게 뭐 있는가, 그런데 진짜 궁금한 게 있다. 그런 소소한 적의를 감소시키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인간은 그냥 그런 존재인 건가, 나보다 잘난 사람은 다 잘난 척하는 것인가, 공정한 경쟁에서 질 바엔 차라리 불공정한 사회가 탓할 게 있어서 그래도 편한 것인가, 그래서 태생으로 차별하는 전근대적 신분 사회가 여전히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인가.

 

내게는 지워지지 않고 틈만 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외계어 같아서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느리게 느리게 해석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소소한 적의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이어지는 생각이 있다. 내가 그의 바닥을 건드렸구나, 그런데 빌어먹을 이 바닥이란 건 왜 이다지도 얕은 것일까, 그리고 그 바닥이란 건 왜 한결같이 어둡고 칙칙한 것일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그 속담은 대체 어느 먼 옛날 전설인 건지, 인간의 속이란 건 그냥 빤히 보이는 수면 바로 아래인 것이다, 왜, 도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