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계란으로 바위 치기의 비밀

아난존 2019. 3. 29. 08:35





약자를 두려움에 가두는 말 중 단연 으뜸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 단단한 바위에 부딪혀 처절하게 박살 나는 계란의 이미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하다. 그래서 이 말은 무모한 행동의 결과보다는 행동 자체를 못 하게 만드는 효과가 탁월하다. 그다지 제도적이지 않은 나도 이 말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다.

 

25만 년 전 돌도끼에서 동물단백질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보면서 문득, 바위에 부딪혀 깨진 계란도 최소한 단백질 흔적은 남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룩도 남길 거고, 풍상을 거치면서 기억도 소환하겠지, 그러니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의미 없는 일이 아니야, 하다가 다시 드는 생각, 아니다, 계란과 바위의 존재가 고정된 게 아니지?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말들, 사고를 통제하는 말들은 확실히 위력적이다. 새끼 때부터 기둥에 묶여서 자란 코끼리는 다 커도 도망갈 생각을 못 하는 것처럼, 약자로 한번 낙인된 존재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벗어날 힘을 가져도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 노예근성이 주인의식보다 편해지면 그때부턴 책임이 뒤따르는 자유가 공포고, 오히려 제약의 울타리가 보호책이며 안전망이니까, 인간이나 코끼리나 별반 차이가 없다.

 

더욱이 우리의 노회한 세대들, 세상은 약육강식이라 굳게 믿고 강자에게 한없이 순종적인 세대들은, 약자가 힘을 가지면 더 약자를 괴롭히며 여전히 강자에게는 굽신거리는 꼴을 지겹도록 많이 봐왔다. 지주보다 마름이 더 미운 소작농들은 그래서 마름의 숫자를 늘리고 싶지 않다. 왜냐, 그들에게 마름은 지주보다 더 나쁜 존재니까, 국민이 지주라고 설득해봐야 소작농의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권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이 쥐어져도 그것이 권력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소작농으로 살면서 나쁜 마름을 욕하고 저 멀리서 아득히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지주를 칭송한다. 그러니 지주는 땅으로 내려와선 안 된다.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 마름의 위치로 떨어진다. 이런 구조가 정계뿐일까, 재계, 학계, 종교계 등등 구석구석이 그렇다. 언제쯤 우리는 다수가 자유인인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 농경사회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 식민지 백성의 DNA를 퇴행시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