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의 판타지

아난존 2018. 10. 17. 09:56




인간은 99%가 같아도 1%의 차이 때문에 서로 이해 못 하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린 그 1% 때문에 원수가 되고 상처를 받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그 차이가 1%가 아닌 0.1%라 해도 생수에 붉은 잉크 떨어지면 붉은 물이고, 파란 잉크 떨어지면 파란 물인 것처럼, 남자와 여자는 염색체 46(23) 중 성염색체 1쌍만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므로, 그러니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해 봤자 그것이 문제 해결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똑같으니까 싸운다고? 참 성의 없고 관심 없는 말이다. 아무리 공통점이 많아도, 그 공통점 때문에 똑같아 보여도, 상대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원수가 되는 균열은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와 달라서 나는 결코 이해가 안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루비콘강을 건너고 만다. 루비콘강을 이미 건넌 사람에게 남은 건 내가 요단강을 건너느냐 타자를 건너게 하느냐 하는 양자택일뿐이고.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설령 죽었다 깨나기를 12번을 반복한다 해도,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현실에서는 없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상대를 에어컨처럼 텔레비전처럼 감정을 제거한 채 기능만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전원 누르면 전기 돌아가듯이, 저 사람은 이 버튼에 이런 행동 보이고 저 버튼에 저런 행동 보이는구나 하고 사용법을 익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교류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차피 안 되는 일이다. 얼마나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어려우면, 있는 그대로 보자, 하는 이런 말까지 다 나왔을까 싶다. 팔이 안으로 굽듯이 나한테 잘하는 사람의 결점은 연민으로 감싸게 되고, 나와 관련 없는 사람에겐 나도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단점은 미치도록 거슬리게 마련이다. 그냥 그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자는 식의 판타지를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 양 말하지 말자. 그건 상상력의 산물로 이상적인 관계 설정이라 우리가 모두 AI로 진화하지 않는 이상 관념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즉 공염불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