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안빈낙도와 소확행의 차이

아난존 2018. 10. 15. 06:23



조선 시대 은둔 선비들이 지향했던 안빈낙도에는 세상에 대한 포기는 있었으나, 자신에 대한 포기는 없었다. 그래서 벼슬을 포기하니 자연이 눈에 들어오고, 권력을 포기하니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 보이는 것이다.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진지 속에서 안전한 평화를 누리는 것, 그것이 거꾸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에, 여기에 안빈낙도(가난함 속에서도 이를 편케 여기며 도를 즐김)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세상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축소시켜서 위안 삼는다. 전용 비행기 타고 일본 가서 스시를 먹고 싶지만 그게 안 되므로, 동네 스시집에서 포장한 초밥을 집에서 캔맥주와 먹으며 예능프로를 보노라면, TV 속에서 나의 욕망을 대신 실현해 준다.

 

공통점은 안빈낙도도 소확행도 혼자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런데 여기에도 차이점이 존재한다. 안빈낙도는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는다. 달님도 벗이고 바람도 벗이니 굳이 인간 친구가 없어도 한세상 견딜만하다. 그러나 소확행은 타인과의 교류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것이 인스타그램의 인기 요인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혼자서도 잘 놀고 있다는 걸 타인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지나치게(이런 말은 안 했지만)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기에 과시욕의 변태적 왜곡인 갑질도 생겨나고,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기어오르고자 을질도 하는 것이다. 이러니 저리니 해도 우리는 매일 매일을 갑질과 을질의 줄타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회사에서 을인 사람이 소비자일 때는 갑질을 하고, 집안에서 갑인 사람이 사회에선 을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어지간히 자신을 강박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한 불안과 갈등이 임계점에 이른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갑질과 을질을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다. 그러니 이도 저도 싫은 사람들이 혼자만의 세계에 둥지를 트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내가 상처받는 것도 싫지만 남을 상처입히는 것도 싫다.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있긴 하지만, 굳이 이것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소확행이란 게 물론 반드시 혼자 하는 일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사람 수가 많을수록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 친밀할수록, 그 행복감이란 게 작지도 확실하지도 않아질 확률이 커진다. 그러다 보니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마련이고, 사회 전체로 봐도 혼자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혼밥, 혼술이 당연시되고 혼자 보는 영화, 혼자 떠나는 여행 등 이런 나홀로족 문화의 확산은 바로 이 소확행에 따른 산물이라고 하겠다.

 

정리하면, 조선 시대의 안빈낙도나 오늘날의 소확행이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한 스킬임엔 변함이 없다. 다만, 자족의 방향이 안빈낙도는 자기 자신에게 향한 반면 소확행은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은둔한 선비는 자신이 직접 술을 마셔야 하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먹방을 보면서도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이 비록 대리만족이긴 하지만 타인과 나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