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넘게 과일 장사를 해서 모은 400억 원대 땅과 건물 등 전재산을 고려대에 기부했다. 누가? 91세 김영석 씨와 83세 양영애 씨 부부가, 왜? 어려운 학생들 공부하는 데 힘이 되라고, 자식은? 두 아들 다 미국 이민 가서 자신들의 재산을 더 좋은 곳에 쓰고 싶었다고, 근데 왜 하필 대학? 무학자에게 명문대란 어마무시하게 고귀한 곳이라서, 고생해서 어렵게 번 돈을 차마 나를 위해 쉽게 쓸 수가 없어서? 그래서 기부한 곳이 대학?! 하필이면 대학에…
공부 잘하면 인재인 걸까? 이런 사고에서 우린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루 차이로, 문재인 대통령 퇴진과 국가수호를 위한 지식인 320인 선언이 발표됐다. 그 지식인 대표가 김문수, 김진태, 심재철이란다. 공통점이 있다. 모두 서울대 출신의 자한당 정치인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서울대가 가진 프리미엄 효과를 생각하면, 에효…, 왜 부끄러움은 가진 것 없어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의 몫인 건지, 중고등학교 때 공부 열심히 안 해서 서울대 못 간 게 천추의 한이 되는 순간이다. 내가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서 잘근잘근 이들을 씹지 못하는 게, 괜히 공부 못했던 과거가 참으로 굽이굽이 반성된다.
자기 돈 자기가 쓰고 싶은 데 쓰는데 누가 간섭할 수 있을까, 기부가 박한 우리 사회에서 좋은 일을 하신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그게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힘들게 번 돈일수록 좋은 데 쓰고 싶은 마음이 너무 이해되는 터라, 그 좋은 데가 왜 하필 대학인 건지, 언제쯤 우리 사회는 대학, 정확히는 명문대의 지배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지, 비 오는 가을날 마냥 추적추적 우울해져서 말이다.
귀족 주인에게 맛난 거 귀한 거 진상하는 노비처럼, 내 입에 맛난 거 귀한 거 못 집어넣는 그런 노예근성이 말끔히 사라지는 날, 그날이 오면, 온갖 종류의 연고주의도 사라지겠지, 나를 옭아매는 혈연, 지연, 학연, 교연 등 이런 족쇄를 풀고, 영혼을 마비시키는 황금빛 노예의 사슬을 끊고, 태어난 그대로 가장 가벼웁게 사뿐히 사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판타지의 세계를 잠시 꿈꿔본다. 이 가을날 비도 오는 날, 그냥 SF 한번 생각해봤다. ▣
'소통과 관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재명 사태 또는 이재명 신드롬 (0) | 2018.10.31 |
---|---|
분노, 경멸, 존재의 하찮음 (0) | 2018.10.27 |
정우성과 김어준, 그들이 사는 세상 (0) | 2018.10.20 |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의 판타지 (0) | 2018.10.17 |
안빈낙도와 소확행의 차이 (0) | 2018.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