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가 예의이고 어디서부터가 위선일까.
이해관계가 없는데 친절하면 예의고, 이해타산을 감추고 있으면 위선일까.
그런데 이 경계가 명확히 존재하긴 할까.
인성이 돈이 되는 세상에선?
연예인의 경우 좋은 인성 노출은 인기로 직결되고 인기는 곧 돈이다. 포장된 상술이라고 해도 들키지 않으면 자산이다. 그래서일까, 연예인들의 폴더 인사는 기사가 된다.
이 경우 예의는 인성이란 이름의 자본이다.
집단 왕따 문화를 경험한 세대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튀면 찍힌다는 현실을 피부로 경험한 세대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걸 속담으로 배운 세대는 확연히 다르다. 혼밥, 혼술이 괜히 트렌드가 되는 게 아니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데 한층 조심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위선은 생존이다.
동문회에 갔다 와서 나는 침전 당했다.
문제의 원인 제공자들은 여전히 좋은 사람의 위치를 지키고 있고, 피해자인 학부생들은 피해자가 아닌 척하고 있고, 대학원생들은 뒤에서 욕하고 앞에서 웃으며 각자 자기 몫의 이익들을 챙기고 있고.
굴욕을 견디는 게 삶이라고 했던가, 나는 무엇을 바라 이리 침전하는지, 하고 탄식했던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사람이기라도 하지, 나는 뭔가, 대체 무엇 때문에 식민지 백성 노릇을 하고 있는 걸까, 윤동주의 소심한 정의감은 비겁해도 순결은 한데, 내 영혼은 순결하지도 않다.
예의를 가장한 위선의 잔치에 초대받은 영혼은 어디에서 주권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한용운이라면 나의 이런 가증스러운 질문에, 주권을 빼앗긴 거지에게는 인권도 없다, 하고 말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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