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진실 또는 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

아난존 2018. 8. 27. 14:48




오늘 상위 팟캐 중 하나를 듣다가 조기숙 교수의 구좌파, 신좌파개념이 잘못 언급되는 걸 알았다. 나 역시 다른 팟캐에서 게스트로 초대된 조 교수의 발언을 흘려들은 정도라 그 개념에 대해 아주 상세히 알지는 못한다. 사실 그런 개념 정의가 곧 실체 자체도 아니며, 일부 실체가 전체를 규정하지도 못하기에 30년 가까이 이론에 탐닉해온 나로서는 이론은 이론으로서, 딱 그만큼의 가치만 있다고 생각한다.

 

칼이 있어야 사과를 깎지만 꼭 사과 깎는 칼이 한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과를 씻어서 그냥 통째로 먹는다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다만, 특정 요리를 할 때는 특정 칼이 요구될 뿐이고, 그러나 그래 봐야 사과는 사과다.

 

데리다가 차연(차이와 연기)’을 말하기 전에도 언어에 고정된 의미는 없었다. 이것이 서로에게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원인이지만, 소통이란 미명 아래 해결해보려 해도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린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 그래서 나는 대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화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소통이란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다. 일방이 다른 일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일 뿐, 또는 이해가 안 돼도 수용하면 그것이 주고받는 것처럼 보일 뿐, 쌍방 간의 이해 또는 평등한 주고받음이란 인간계에선 불가한 판타지의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이 진리다, 진실이다, 하는 것보다는 그런 믿음의 전개 과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푸코가 주목한 지식의 고고학이 일상에서 발현되는 순간이다.

 

일례로 타블로의 졸업에만 집중한 타진요는 타블로 측의 졸업장 제시와 동시에 시기와 모함의 광기 어린 집단으로 규정돼 버렸다. 그러나 당시 어떤 블로그에서 나는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알바로 대리 수업을 한다는 글을 보았다. 타블로의 경우도 아버지의 극성으로 타블로도 모르는 새에 학점이 채워졌다는 것이다. 그럼, 그간의 모든 의혹이 다 해소된다. 휴학하러 학교 갔더니 이미 학점이 다 채워져 있더라는 타블로의 인터뷰 내용도, 타블로가 수업을 들었어야 할 시기에 다른 곳에 있었다거나 이수 과목들이 일관성 없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타진요의 주장도 모두 모순 없이 병행된다. 물론 이 경우 문제의 초점은 졸업장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졸업 여건의 불법성 여부가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합리적 추론일 뿐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주장의 병립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나는 꽤 흥미롭게 그 블로그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나는 타블로의 대학 졸업에 관심이 없다. 그의 노래를 들은 적도 없다. 가수에게 학벌이 중요한지 같은 당연하고도 원론적인 문제 제기는 하지 않겠다. 한때 우리 사회를 일시에 확 까뒤집었던, 줄줄이 걸려든 학력위조 파문의 맥락에서 이 모든 관련 사건들을 이해할 뿐이다. 당시 그의(소속사의 전략이었겠지만) 학벌 마케팅도, 그런 학벌 마케팅의 효과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시대의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면 지나치게 게으른 결론일까, 다만 이제는 그때보다는 학벌 파워가 아주 적으나마 줄어든 것에 다행이라 여길 뿐이다. 나는 소심한 소시민이니까.

 

이후 나의 관심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라 믿어지는 과정으로 시점이 이동되었다. 따라서 조기숙 교수의 신좌파, 구좌파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의 개념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쩌면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