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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먹거리와 우정 사이

아난존 2018. 8. 5. 02:53




영화 <옥자>는 스토리의 자극성에 비해 메시지의 타격점이 분명치 않다.

잔혹하고 비위생적인 가축 생산방식은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더 싸게 더 맛있게 더 많은 이윤을 외치는 글로벌 기업에 대해서는 대자본과 비인간성에 대한 역겨움을, 돈에 얽혀서 움직이는 인간군상들에 대해서는 인간에 대한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키지만, 그 어떤 것도 중심 타격점이 아니라는 게 묘하다면 묘하다.

 

왜일까, 이 모든 비린내 나는 얘기들이 미자라는 깜찍하고 반응 속도 탁월한 소녀의 모험담 속에 담겨 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악당은 희화화되고 남는 건 미자의 활약상뿐?

 

그리고 황금돼지! 도금이 아니라면 겁나 비싸 보이는 황금돼지와 옥자를 딜하는 그 과감한 결단, 깔끔한 결론 앞에 미자는 관객의 구태의연함을 박살 낸다. 자본주의의 역함을 자본주의로 해결하는 우리의 미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다.

 

내게 소중하면 소중한 것이다. 거기에 토 달지 말자.

남에게 먹거리라도 나에게 친구면 친구인 것이다. 거기에 방어하지 말자.

 

내게 억만금보다 소중한 존재라면 그 먹거리는 이미 식품이 아니다.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한가, 뭐가 음식물인지 뭐가 친구인지 그걸 판단하는 건 나와의 관계일 뿐,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중요치 않다.

 

개고기 논란도 그렇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존재이다. 나와 삶을 공유하면 반려이고, 아무 연이 없으면 먹거리다.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지 않은가, 내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인간이고, 모르는 타자들은 생명체일 뿐이다. 생명경시는 경계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사랑은 아니다.

 

미자에게 옥자는 반려지만, 누군가에게 옥자는 먹거리다.

그런데 문제는 먹거리의 윤리성을 논할 수 없는 지점을 옥자가 선점해 버렸다는 것이다. 옥자의 높은 지능과 따뜻한 감성을 관객이 알아버렸다. 이제 옥자는 낯선 생명체가 아니다. 그러니 미자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관객은 이 모든 비린내 나는 얘기들이 사이다 같은 소녀의 우정 깊은 영웅담 속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