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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스, 인간은 창조신의 고단백 지적 영양갱

아난존 2022. 3. 15. 18:21

 

마블의 세계관이 더 갈 데가 없어졌다. 극단적인 지구멸망 음모가 있어야 영웅의 등장에 개연성이 생기는데 악당으로 우주의 질서 유지자 타노스까지 나온 마당에 더 이상 영웅을 돋보이게 할 빌런의 존재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스펙터클의 영웅 서사를 위해 스토리를 장엄하게 만들어줄 빌런, 왜냐면 빌런이 시시하면 영웅도 시시해지니까. 그래서 영화 이터널스는 악당으로 최고 지존인 창조신을 등장시켰다.

 

행성을 계란 껍데기 삼아 성장하다가 완성되면 깨어나서 먼저 태양을 만들고 그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를 만들어 수십억의 생명을 창조하는 존재 셀레스티얼, 역할은 딱 창조신인데 문제는 하나의 셀레스티얼이 탄생하기 위해선 기존 행성의 모든 생명체가 전멸한다는 거. 그러니까 지구 행성 깊숙한 곳에 있는 셀레스티얼이 태어나려면 전 인류가 그의 고단백 지적 영양분이 되어야 한다는 설정, 참으로 가관이다. 이 세계관 뭐냐? 인간을 영양갱으로 만들어 놓고서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이터널스가 죽어라 싸우면 그게 퍽이나 안타깝겠다.

 

영양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비장하게 그린 코미디, 마블이란 막강한 자본과 브랜드 때문에 스케일을 최대치로 키우느라 메소포타미아 바빌론부터 대도시 거쳐 아마존까지 두루 섭렵했지만 느낌이 딱 부루마불 게임이다. 돈을 쏟아부은 노력이 무색하게, 무려 안젤리나 졸리가 마동석과 커플이나 이 역시 한국인 소비자를 위한 안배일 뿐 이터널스의 인종, 성별, 지역에 따른 고른 분배는 휴머니즘보단 자본주의의 성과다.

 

고대문명의 영웅 서사와 신화들이 부루마불 게임판 위의 말들처럼 아기자기하고 소소하다. 그런데 캐릭터들만 비감하다. 자신들이 창조신의 영양갱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인류에 대한 연민으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이터널스의 행동이 그래서 유치해 보인다. 그래봐야 부루마불인데 하는 느낌?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전편에서 타노스가 우주 절반을 없앤 행위가 인류 몰살의 시나리오를 연기하려는 계획이었단다. 그런 슈퍼빌런의 깊은 뜻을 모르고 철없는 어벤져스 애들이 죽음까지 감수하며 지구의 인구수를 원상태로 돌려놨으니 이제 영양분 만땅인 지구에서 셀레스티얼이 탄생하는 건 시간 문제.

 

이렇게 마블의 친환경적 세계관은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인구 조절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는데, 그런데 이런 깊은 뜻을 왜 이터널스가 방해하는지, 이들을 지구로 보낸 셀레스티얼 종족의 아리셈은 창조신답게, 이왕 엎어진 계획, 그렇다면 지구인이 생존 가치가 있는 영양갱인지 확인하겠다며 이터널스 중 셋을 데려간다. 어라? 그럼 이카리스의 죽음은 뭐임? 주군인 아리셈의 뜻을 배반한 죄책감에 태양을 향해 달려들어 생을 마감했는데, 이카루스 신화의 구색 맞추기용 엔딩? 이건 캐릭터들을 지나치게 도구적이고 소모적으로 다루는 마블의 갑질이다.

 

그러나 마블 시리즈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이루어진 세계관에 따라 쿠키영상은 다음 편을 예고하고, 마블의 찐팬이 아닌 사람들도 도대체 저토록 엉성하고 허접한 세계관이 어디로 갈지 살짝 궁금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