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대를 초월해 인기 있는 스테디셀러, 성장소설이지만 삶의 마디마다 생각나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의 원텍스트 '데미안'을 가장 최근에 읽었을 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 책 주요 등장인물의 남녀 성별을 바꾼다면 어떨까? 데미안의 감동이 그대로 유지될까? 아님, 새로운 감각이 열릴까?
일단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여성으로, 비중 있는 조연인 에바 부인과 베아트리체를 남성으로 바꿔보자. 이미 완성된 자기 세계를 가진 데미안 언니가 아직 미숙한 싱클레어 동생을 이끌어주고, 싱클레어는 자신이 실수에 허덕일 때마다 데미안 언니를 그리워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갈망한다. 그래서 데미안을 우연히 만났을 때 주저 없이 그녀를 미행하고 마침내 기다렸다가 극적으로 만난다.
데미안의 집으로 간 싱클레어는 그곳에서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무리의 중심에 데미안의 아버지, 에바 아저씨가 있는 걸 본다. 그런데 그 에바 아저씨는 싱클레어의 이상형으로, 행동하는 지성인의 전형이다. 싱클레어는 오래전부터 에바 아저씨를 꿈에서 봐왔던 것, 그러니 한눈에 반했다고 해도 우연이 아니다. 싱클레어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니까 현실에서 넘어야 할 제약도 없고, 되려 선배인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고백에, “에바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 중 우리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너무 당연한 얘기지, 하는 태도로 받아들인다.
싱클레어는 사춘기 시절 미남의 순정남을 이상형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남자는 현실에 없는 관념적 인물이란 걸 깨달으면서 자신이 닮고 싶은 남성, 자신에게 바라는 인간형을 미래에 만날 연인의 이상형으로 삼게 되었다. 그렇게 조합된 이미지가 에바 아저씨! 그런데 그가 데미안 언니의 아버지! 그래도 너무 좋은 걸 어쩌랴, 이 사랑을 더럽히지 마라, 그건 속물이다.
어떤가? 원작에선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새로운 기이함! 왜 그럴까?
일단은 익숙함에서 벗어난 이질감 때문일 것이다. 에바 부인과 베아트리체는 남성 화자에 의해 작위적으로 형상화된 상징적 여성상이다. 서구의 여성상은 고대부터 여자는 여신 아니면 창녀인데, 이는 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적 개인으로 생각하지 않아서이다. 그리고 이런 서구적 여성상은 문화를 통해 그대로 동양에도 전파된다. 그래서 베아트리체나 에바 부인이나 처녀냐 과부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둘 다 현실에선 볼 수 없는 상징화된 인물, 남성 화자가 최대치로 상상력을 극대화해 만들어낸, 대놓고 2D화된 인물이다.
물론 ‘데미안’이 소설인 만큼 작가에 의해 등장인물이 전형화되고 평면화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살아있는 인간도 문자화되면 박제되니까. 다만 박제하는 시점에서 어떤 순간을 포착하느냐의 문제인데, 남성 인물들은 현실적 조건과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데미안이야말로 현실에선 도저히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의 이상화된 인물인데도 그는 군인이라는 구체적인 직업을 선택한다. 자신의 실존을 위해 그것이 최선이라 여기며, 군인으로서 과하게 운동하고 말 타는 훈련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싱클레어야 미숙한 소년에서 차츰차츰 완숙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이 소설의 큰 줄기인 만큼 독자가 가장 이입되기 쉬운 존재이고.
따라서 존재만으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여성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하면 여성들은 함정에 빠지고 만다. 결혼 전엔 베아트리체처럼 사랑받고, 결혼 후엔 에바 부인처럼 숭배받는 방법이 현실에선 단연코 없다. 그렇게 자기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채 타인과 사회가 설계해 놓은 프레임 안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니 자꾸 한계에 부딪는다. 나는 나예요, 그냥 나로 봐주세요, 그렇게 배운 대로 사고하면서도, 행동은 사랑받고 싶고 숭배받고 싶은, 외부로부터 주입받은 욕망에 휘둘리는 여성이 되기 쉬운 것이다.
약자로 길들어져서일까, 여자어? 그런 말이 있다. 미움받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좋은 말만 하고 칭찬하고 감사하고, 물론 그게 진심이면 좋겠지만 문제는 속내와 다른 겉치레라는 거, 그런데 더 문제는 일본인의 혼내처럼 지금은 아무도 그런 겉치레에 속지 않는다는 거, 그래서 상대가 분명 내게 웃고 있는데도 그걸 진심으로 여기지 않는 세상. 그러니 이런 세상에서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여자어를 익힐 수밖에 없다. 약자이나 약자로 살고 싶지 않기에 상대에게 타격감이 큰 화법을 연마하고 권력을 이용하는 기술을 습득한다.
물론 자기 힘으로 능력 있는 여성, 주체적으로 유능한 여성이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아직은 웹소설이나 웹툰에서만 데미안 언니, 싱클레어 언니 유형을 만날 수 있는 듯하다. 웹 세상에선 권력형 여성, 독재자 여성, 성장형 여성, 사랑에 적극적인 여성, 권모술수에 능한 여성, 정의로운 여성 등등 자신의 삶을 자기 기질대로 이끌어가는 주도적이고 실존적인 인물형이 대거 존재한다.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만 성장하는 여성 인물은 민폐형이라고 해서 바로 독자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지금 비판받는 페미니스트의 문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영을 선택하고, 그 진영과 연대해 개인의 욕망을 충족해서가 아니다. 뻔히 그러면서 그러지 않은 척해서 사람들을 반페미로 만드는 것이다. 베아트리체처럼 남성의 권력에 의존하면서 에바 부인의 권위를 흉내 내려고 하니까 자꾸 욕망이 왜곡된다. 만들어진 여성상에서 나와 자기만의 세계를 구현해야 하는데 현실에선 그런 여성을 만나기가 어렵다. 글쎄, 82년생 김지영 이후 세대는 가능할까, 그러려면 먼저 인간을 유형화해서 규정하는 사회 분위기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래도 혈액형 4종류에서 MBTI는 16종류니 그나마 사회가 다양해진 거라고 위안 삼아야 할까? 글쎄, 개별자에 대한 사랑은 구체성이고, 구체성은 인내를 요하니, 타인을 위해 그런 시간과 감정을 쓰는 시대가 현 인류에게 올 것 같진 않다.
'경계인이 된다는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내 식탁을 치웠을까? (0) | 2021.10.26 |
---|---|
종교가 문제일까, 신의 이름으로... (0) | 2021.08.28 |
내 안의 동물농장 (0) | 2021.08.04 |
니체의 권력 의지와 한국형 갑질의 차이 (0) | 2021.07.11 |
공정이 뭐?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0) | 2021.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