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능동적 니힐리즘을 말했다. 형용모순 아닌가? 허무한데 뭘 어떻게 능동적으로 하라고? 그래서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리고 악용되기 딱 좋다. 단어만 나열해 보면,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 것이니 쓸데없이 작위적인 선악 따지지 말고, 능동적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갖고 권력을 쟁취하라는 말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권력에의 의지가 있으니 약자의 위치에서 타인에게 벌레처럼 짓밟힐 것인지, 아니면 옳은 척 착한 척 가식 떨지 말고 타인을 짓밟을 힘을 갖출 것인지 선택하라는 협박처럼도 들린다. 그래서 강자가 되란 말로 착각하고 권력 투쟁을 합리화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니체가 좀 더 용감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쇼펜하우어처럼 됐을까? 위에서 아래를 깔아보며 인생 뭐 있어, 즐기다 가라고, 너나 나나 속 시커먼 인간인 거 우리 서로 다 알잖아? 알만한 사람들끼리 왜 이래, 이렇게 됐을까? 그게 싫었던 것일까? 아님 그럴 수 없을 만큼 순진하고 순수했던 것일까? 그래서 비겁했던 것일까?
“강한 자들은 언제나 약한 자들에게, 체질적으로 훌륭한 자들은 언제나 체질적으로 약한 자들에게, 건강한 자들은 언제나 병들고 생리적으로 실패한 자들에게 맞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니체의 이 말도 보라, 얼마나 비겁한가! 그는 형편없는 인간들, 그러니까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써 자신을 확인받고, 돈이나 명예나 권위 같은 허상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인간을 약한 자로 정의했다. 왜냐, 그들은 체질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병들고 생리적으로 실패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므로. 그래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에 휘둘려 살다가 끝내는 타인이 명명한 허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 없이 죽을 것이기에. 그러니 이런 약자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기 자신의 정점에 도달하려는 초인적 의지 한 번 가져보지 못했으니.
서울대 환경미화원 사망 사건이 연일 보도되면서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느끼는 게 나뿐일까? 업무만으로도 과로한 청소노동자에게 중국인 유학생들 안내를 위해 영어, 한자 필기시험도 봤단다. 우린 보통 외국에 가면 그 나라 언어를 약간이라도 배워가지 않나? 더구나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배우려고 온 유학생이라면 기꺼이 안내 책자든 통역기든 뭐든 이용해서라도 한국어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이건 애초에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업무 외적인 일을 강요하는 것, 그냥 그게 갑질이니까. 그리고 니체식으로 말하면 그런 갑질을 하는 인간들이 약한 자고 병든 자인 것이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체질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한테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이라는 거, 그러니 니체가 아무리 갑질하는 사람이 형편없는 인간이고, 알고 보면 그들이 진짜 약한 자야, 하고 외친들 그게 현실에서 먹히냔 말이다. 화나고 슬픈 일이다.
그래서 아모르 파티, 자기 운명을 사랑하란 말을 각주로 첨부했지만, 그걸 대체 누가 얼마나 알아들을까. 나약해지고 병들지 않으려고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 권력에의 의지란 걸 니체 당시에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100년이 좀 더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들 과시용으로 샤넬백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행위는 수동적 니힐리즘이고, 샤넬백의 가치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행위는 능동적 니힐리즘이란 걸 구분하긴 어렵다. 예를 들어, 새로 산 샤넬백을 잊어버렸을 때 전혀 타격감이 없다면, 그게 비싼 물건이든 소중한 물건이든 물건 따위에 내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는다면, 그럼 권력에의 의지를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나답게 지키는 내적 힘이 진짜 권력이니까.
이처럼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외부적 조건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강한 자이나 그러기엔 우리 인간이 너무 연약하고, 연약해서 사악해지기 쉬운 존재인 걸 어쩔까. 니체식으로 강자가 되려면 현실에선 약자의 위치로 떨어지게 마련이고, 자기 극복과 정신승리는 경계도 모호해서 자칫하면 스스로 잡아먹히게 되는 것을, 니체 당신이 말년의 정신병으로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니체의 정신은 이해하되 니체보단 영악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실존적 전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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