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 너무 없던 시대에는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권력이었고, 이 권력은 독점되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검찰 출입 기자들의 받아쓰기 기사가 문제가 됐던 것도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과정상의 관행, 그러니까 특권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어야 특권이므로, 검찰 정보를 받아서 보도하는 게 언론 권력이란 얘기다. 이때 진실이란 소수가 선택한 사실의 조합 내지는 재구성이다.
그런데 현재 우린 정보 과다의 시대에 살고 있고, 그 선택권이 독자 또는 소비자에게 넘어왔다. 팟빵 시사방송 간에는 진보층 내의 대립이, 유튜브 시사방송 간에는 보수층 내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이걸 재밌다고 해야 할지 다양성 측면에서 좋아졌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런 형국에서 진실이란 정보의 의도적 덧칠을 베껴내는 것 정도가 그나마 사실에 접근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사실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다만 그게 누구에 의해 수집된 사실이냐, 거기서부터 해석의 여지가 개입한다. 이렇게 모인 사실들이 공정과정을 거쳐 진실로 태어난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유통되는 진실들이 서로 적대적이거나 전혀 다른 얘기들을 하고 있을 때 정보 소비자는 몹시 당황스럽다는 거다.
천안함도 세월호도 여전히 진실이 수면 아래 있다는 것도 참 이해하기 어렵다. 대체 누가 정보를 취합하길래, 대체 누가 사실을 왜곡하길래, 대체 누가 거짓을 유통하기에 우린 아직도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는 걸까.
우린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각자 사실이라고 말하는 조각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진실들이 충돌하는 시대. 그러다 보니 정보에 지친 대중들은 답을 정해 둔 상태에서 듣고 싶은 정보에만 반응한다. 불가지론이니 회의론이니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독자 한 사람의 정보력과 판단력은 각자의 경험치와 인식 수준에 제한되는 것이니 어쩌란 말이냐.
판단할 수 없는 정보가 넘쳐나니 우리가 과거보다 그릇된 사유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 유추해내는 결론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상대가 내 카톡 문자를 읽씹했으니 나를 무시하는 거야, 그렇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읽씹이란 사실 외에 상대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 너무 없다는 말이다. 그럼 그대로 판단유보 상태에서 생각을 멈출 필요가 있다.
훗설이 현상학에서 판단중지를 말했던 것도 섣부른 판단, 그러니까 각자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의한 판단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이게 나이 여부와 상관이 없다는 거 아는가? 어리면 어린 대로 경험치가 적어 오판하기 쉽고, 나이 들면 드는 대로 고정관념이 굳어져 오판하기 쉽다. 즉 인간은 종특상 나이로 해결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다만,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불순함을 읽어내는 것, 이것이 오늘날에는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능력 내지는 진실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태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실로 피곤하고 피로한 시대지만 이 역시 민주주의가 부추기고 과학 기술이 선사한 옵션이란 거, 21세기를 사는 인간으로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역하고 필연적인 삶의 방식임을 수용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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