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박원순, 자살과 그 이후

아난존 2020. 7. 18. 15:49

 

무엇이 진실일까? 진실이 과연 밝혀지긴 할까? 더 많은 사람이 믿는 쪽이 진실로 기억되는 걸까? 박원순 시장은 스스로 세상을 떠났으나 세상은 그를 쉽게 보내주지 못할 거 같다. 한 사람의 생애가,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가로 최장수 서울시장으로 쌓아 올린, 이 정도 살아내기 평탄치 않은 그런 사람의 일생 업적이 덧칠되는 걸 보는 마음이 참 아쉽고 착잡하다.

 

자살로는 징벌이 되지 않는 걸까, 살아서 죗값을 치르는 것이 최선이란 주장이 물론 윤리적으로 백번 옳다. 자살을 미화하거나 자살로 죄를 덮는 게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도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는 공직자였고 유명인이었고 자신의 오래된 지지층을 가진 정치인이었기에 더더욱 자살이 선택지에 있어서는 안 되는 위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당위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실은 그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자살이 스스로 내린 징벌이었는지, 타인을 향한 원망이었는지, 세상에 대한 상실감이었는지 그것도 알 길이 막연하다. 다만, 살아서 자신에게 쏟아질 비판이나 비난, 그리고 정쟁의 한복판에서 날아오는 온갖 화살을 맞을 용기가 없음을 시인한 것이긴 하다. 그는 싸우지 않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나이 어린 여비서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그 어떤 형태로도 소명하지 않았다.

 

그의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성추행이 아니면 아니라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모함이면 모함이라고, 뭐라도 입장을 남겨줄 법도 한데 그는 그 어떤 변명도 설명도 항의도 설득도 하지 않는 가장 나쁜 방법을 선택해 버렸다.

 

성서에는 모르고 저지른 죄란 게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마지막에 모르고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내가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무지는 죄라고 선언해 놓지 않았던가. 모르고 저지른 죄도 그게 죄라면 죄는 죄인 것이다. 다만 알고 저지른 죄와 차이가 있다면 피해자의 용서 부분이다.

 

미투는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흐름, 그게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길이고 근대의 이성이 추구하는 방향이므로, 그런 흐름에 순행한다는 점에서 인류 진보에도 인간 진화에도 마땅한 일이다. 따라서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이뤄지면 안 되는 거 역시 두말할 나위 없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너만 참으면 되잖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야만의 시대에서나 일어나는 폭력이며 학대인데.

 

그렇다! 그게 문제다!! 아직 야만의 시대를 다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기존 질서가, 그간의 관행이 잘못됐다고 하니 거기에 익숙해 있는 기성세대나 기득권층이 몹시 불편하다. 그래서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이 조장되는 요즘 왜 이렇게 사는 게 복잡하고 어려울까 싶다. 그냥 상대가 싫다는 건 하지 않으면 되고, 누군가 피해를 호소하면 같이 나서주면 되는데, 사는 건 그다지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지 답답하고 혼란하다.

 

타인에 대한 믿음도 조직에 대한 신뢰도 없으니 부당함을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다. 권력자에게 직접 말하자니 불이익을 당할 거 같고, 주변에 호소해봐야 들은 척도 안 한다. 내 일도 아닌데 남의 문제로 자신의 에너지를 나눠줄 사람이 우리 보통 사람 중에는 없어도 너무 없다. 오히려 조직에서 누구 하나 희생되어 다수가 편하다면 그걸 선택하는 게 우리네 범인들 심리다. 이게 인지상정이라고 경험으로 터득했다면 냉소적인 걸까.

 

여성으로 살면서, 요즘은 남성에게도 일어난다고 하지만, 성폭력에 노출되지 않았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만큼 만연하고 그만큼 익숙하기에 가해자는 그게 죄인지도 모른 채 저지른다. 그래서 성인지감수성이 있냐 없냐를 따지지만 사실 성인지감수성이란 게 정확한 기준도 객관적 실체도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상대의 감정, 즉 불쾌감을 주었는지가 관건인데 이게 얼마나 주관적인 감정인가.

 

그러니 어쩌자고? 가장 좋은 조직은 누구나 자신의 의사표시를 분명히 말해도 그것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다. 직장 상사에게 당당히, 그런 문자는 불쾌해요,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에요, 이런 일은 시키지 마세요, 말해도 불편하지 않은 사회가 된다면 다수가 소수를 제물 삼아 권력자를 괴물로 키우는 조직의 악행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다수여 용기를 내자,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사회는 결국 나도 안 괜찮게 만들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미투는 그간 약자였던 여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이다. 그런 만큼 인식의 대전환 시점에서 행여나 여성들이 이를 악용하거나 악용을 방치하거나 악용에 동조한다면 그건 정말로 끔찍한 실수이며 오류라는 걸 알아야 한다. 미투가 반감을 사게 되면 다수는 용기를 낼 수 없게 된다. 미투가 의심을 받게 되면 다수는 비겁함을 합리화하게 된다. 이런 사회가 서로에게 혐오와 분노를 조장함은 익히 봐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제라도 박원순을 고소한 여성이여,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 다오. 우리가 원하는 건 그 어떤 정치적 함의도 제거된 당신 자신의 목소리다. 당신의 정직한 고백만이 여성으로서의 당신 삶도 우리 사회의 안전도 한결 나아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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