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적의와 악의의 구분

아난존 2020. 5. 26. 03:12

 

인간으로 태어나 산다는 건 크고 작은 적의들과 끊임없이 만나는 일이다.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부분에서도 아주 쉽게 적의를 갖게 되고 그것이 적의인지도 모른 채 상대에게 그 불편하고 어두운 감정을 드러낸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시기심에서 촉발된 적의였다. 카인을 더 미치게 했던 것은 아벨의 순수함이었으리라, 아벨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그렇게 해맑게 자신의 제물을 신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얘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밝은 사람의 얼룩 없는 빛은 어두운 사람의 얼룩진 내면을 너무 쉽게 드러내고 만다. 아벨은 카인을 잘 몰랐기에 카인에게 정직했지만, 바로 그 정직함이 카인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우리 인간은 아벨 부류보다는 카인 부류가 더 많다. 그래서 겸손을 생존의 조건으로 요구받는다. 살리에리 증후군, 영화 아마데우스에선 모차르트에 대한 시기심에 끝내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내몬 살리에리의 입장이 나오는데, 물론 살리에리 역시 훌륭한 작곡가였으니 실제론 범인도 아니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2인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문제는 모차르트가 천재라는 데 있다.

 

악의는 적의와 다르다. 타고난 악인들, 죄의식이라곤 1g도 없는 유전적 변태들은 자책감이나 후회 같은 게 애당초 없다. 사이코패스든 소시오패스든 그런 치들은 자신의 안녕과 즐거움을 위해 세상이 존재하고 타인이 움직여야 한다. 악의는 상대가 누구든 중요치 않다. 오로지 나의 영달만이 있을 뿐이다. 타자에 따라 악의의 총량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악의를 드러내면 그건 그 사람만의 문제이므로 내가 관여할 바 못 된다.

 

반면 누군가 내게 적의를 드러내면 그건 나하고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니 고민해 보아야 한다. 나의 의도 없음이 그의 지질함을 건드렸다면 그를 품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고, 나의 불순한 의도와 그의 불순한 의도가 수면 아래서 불쾌하게 부딪혔다면 나의 수양을 위해서도 그 관계는 멀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