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선택적 정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내게 이익을 주고 나한테 잘해준 사람의 잘못은 거슬리지 않는 게 인지상정, 나 역시 선택적 정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문제는 항상 정도의 문제라며 도피처를 만든다. 다만, 정도의 문제에서 공사 구분과 영향력의 여부를 기준 삼지 않으면 선택적 정의는 그 자체로 불의가 되고 만다. 권리만큼 의무 있고 권력만큼 책임 있다는 거, 이게 안 되면 불공정에 대한 억울함이 혐오사회를 부른다.
불륜에 제3자가 간섭할 수 없는 건 사생활이니까, 그건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니까, 공동체나 타인에게 위해만 가하지 않으면 남의 사적 영역을 건드리는 건 쓸데없는 오지랖이니까, 그러니 불륜이든 로맨스든 남의 사랑에 내가 간여할 바 전혀 없다. 다만, 내로남로든 내불남불이든 당사자들이 이 정도의 일관성은 가져 주길 바란다. 그래야 선택적 정의의 편협함이 혐오사회를 부르는 걸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으니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경험치가 쌓이는 일인 만큼 관점의 단순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보이는 게 많으니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때론 그 시간의 무게 때문에 선택을 포기하게 된다. 원만한 성격과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건 다른 층위인데도 그걸 굳이 구분하면서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진다. 그래서 부질없음의 세계가 점점 커지면서 무기력이 관성화된다. 그러니까 무기력은 뭘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뭘 알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선택적 정의를 보고 있노라면 내로남불만 하지 마라, 그건 누군가에겐 분노를 누군가에겐 무기력을 강제하니까, 선택적 정의는 모든 인간이 가진 결함의 문제다. 그러니 나는 공정하다는 무지에서 벗어나 나만 특별하다는 선민의식 버리면, 최소 내로남로나 내불남불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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