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재난 영화는 대체로 인기가 좋다. 장르 특성상 제작비가 웬만해야 촬영이 가능하고, 웬만한 제작비는 웬만한 배우들을 등장시킬 수 있기에, 재난 영화는 두루두루 기본은 한다. 클리셰 어쩌구 해도 불특정 다수에게 들이닥치는 예기치 못한 순간의 스릴과 공포가 재난 영화를 보는 짜릿함이다. 방화 특유의 신파만 피해 간다면 억지스러운 휴머니즘 때문에 괴로울 일도 없다. 영화 부산행을 보면서 오로지 바란 건 하나, 영화 감기처럼 시대를 과거로 되돌린 것 같은 기이한 신파만 아니면 된다는 거, 재난 영화는 그거 하나만 충족하면 기본은 하게 돼 있으니까.
그런데 부산행은 나의 트라우마를 확 건드리며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보통 사람들의 본능적인 이기심과 그런 이기심을 이용할 줄 아는 나쁜 놈과 그 나쁜 놈 때문에 끝내 죽는 주인공, 이런 클리셰는 정말 기분을 묘하게 한다. 타인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제 겨우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이 됐는데, 그렇게 이타적인 인간이 되자마자 죽고 마는 주인공, 나는 이런 장면과 만날 때마다 예수의 죽음이 자동완성된다. 당대 기득권에 대항했던 예수는 예수가 불편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충동질에 넘어간 민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인간 사회의 다수에 해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고 불리는 대중들, 그들을 의지적으로 칭해 민중이라고도 부르지만, 바로 그 보통 사람들의 성정이 좀비와 같다고 부산행은 말하고 있다. 소수만이 타인을 위해 위험을 나눠진다. 대다수는 나의 안전과 보존만이 유일한 행동 원리이다. 그래서 결국 모두가 죽는 사회가 되고 만다. 그거 알아? 모두가 각자 나만 살려고 하다 보면 종국에는 다 같이 죽는 거거든? 예수를 죽인 건 로마 사람 빌라도 총독이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식민지 백성 유대인들은 소수 기득권층의 선동에 휘둘려 젊은 선지자 예수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 나약하고 비겁한 그 보통 사람들은 언제든 권력에 복종할 준비가 돼 있다. 그 권력이 때론 사악하고 때론 잔혹해도 이를 판단할 용기를 배운 적 없는 것처럼 평소 행동한다. 그러다 결국 다 죽게 되면 그때서야 죽기 직전에 용기를 낸다. 새삼 정의가 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인간성이란 게 원래 그렇게 형편없는 건 아니라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상황은 언제나 누군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 억울한 누군가가 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거나, 어차피 죽기 직전이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일 때만 비로소 용기가 발현된다.
우리 보통의 대중들, 너무 쉽게 좀비가 되고 마는, 그러나 끝내 본인이 좀비인 줄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물린 만큼 남을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게 안 되면 누구는 분노조절장애라는 이름으로, 누구는 조현병이란 이름으로, 누구는 공황장애라는 이름으로 타인이든 자신이든 괴롭혀야만 한다. 대체로 강자는 약자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고 약자는 강자의 사고방식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강자는 약자가 혐오스럽고 약자는 강자가 두렵다. 강자에게 약자는 이질적인 대상이나 약자에게 강자는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비는 동경하는 미지의 대상마저 자신과 같은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기에 약자에게 좀비 영화는 통쾌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잘난 인간도 좀비가 되면 똑같아진다. 지혜도 지식도 권위도 권력도 다 쓸데없는 상태, 이보다 더 평등할 수 없는 상태, 인간의 존엄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상태, 그래서 좀비가 된다는 것이 끔찍하지만 막상 좀비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 나는 영화 부산행이 우리 이제 좀비로 살지 말자고, 더는 좀비가 되지 말자고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아서, 그리고 그런 외침은 곧 잊힐 거 같아서, 때때로 나를 사로잡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아주 많이 슬펐고 또 아팠고 그래서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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