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의 결말은 평면적이고 계몽적이다. 열차 속 계급 구성이 그렇고, 칸마다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이 그렇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굳이 기차를 그렇게 폭력적으로 세워야 했다. 희생 없이 혁명 없으니까, 자유에는 피 냄새가 난다던 어느 시인의 문장이 여전히 감동적인 세상이니까, 다만 지금은 인류가 많이 지친 상태라는 거, 그래서 결연하게 기존 체제를 폭발시켜봐야 다시 설국열차의 세계가 마치 인류사에 생판 처음이었다는 듯 그렇게 똑같이 순환될 것이란 의심이 든다 해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되도록 적은 희생으로 계급차별을 없앨 수는 없었는지, 아니면 그냥 기차를 얌전히 세워서 남은 결정을 생존자들 각 개인에게 넘기면 안 되는 거였는지, 다른 결말에 대한 사념 없이, 미래의 희망으로 상징되는 아이 둘의 생존을 그저 수긍하게 된다.
그에 비해 기생충의 결말은 설국열차보다 비참하고 복잡하다. 인생의 속사정이 드러난 특정인의 죽음은 불특정 다수의 대량학살보다 가슴 아픈 법이라, 설국열차의 떼죽음보다 기생충 등장인물들의 죽음이 더 여운을 남긴다. 설국열차는 다수의 사람이 이유도 모른 채 한꺼번에 죽고 끝나는데도 아이 둘의 생존만으로 희망을 읽는다. 반면 기생충은 고르게 계층별로 배치된 죽음에, 부자도 빈자도 극빈자도 사건에 휘말리면 저항도 못 해보고 죽는 마무리에 불편함을 느낀다. 대놓고 악질적인 인물이 없는데도 사건의 우연들이 뒤엉키면서 적의가 생기고 상대를 죽일 만큼 증오하게 돼 버리는 결말, 그런 결말이 가난으로 발생했다는 게 관객을 두렵게 만든다. 가난하면 저렇게 비루해질 수 있어, 두려움은 실제보다 상상일 때 그 효과가 더 크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는 관객이라면 실제 그렇게 극빈자일 리 없다. 그러니 관객의 두려움은 현실이 아닌 상상이 주는 공포심이다. 나도 저렇게 가난해질 수 있어.
두려움에 빠지면 시야가 제한된다. 그래서 박 사장 같은 유능한 부자도 어이없이 죽는다거나, 부자 사모님도 자립성 없이 기생하는 존재라는 건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가난’이 주는 공포에 절대적으로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우로 잠긴 반지하의 모습과, 남의 집 지하에서 나오지 못하는 무기력한 삶에 자신을 투영해 버린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현실의 무게가 훨씬 더 암울하게 다가온다.
설국열차나 기생충이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전형화되어 있다. 그런 만큼 현실에서 만날 법한 실제 인물이라기보단 정해진 교훈에 도달하기 위한 허구적 세계의 우화적 캐릭터들이다. 그래야 인물들이 주제를 극단적으로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기에,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한결같은 계몽주의자다. 다만 교훈을 전달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우리 있잖아, 사회적 위치가 자신의 본질인 줄 알고 주입된 욕망에만 충실하게 살다간 결국 다 죽는다? 부자들은 안전할 줄 알지? 아냐, 부자도 죽어, 이처럼 교훈은 같은데 표현방식이 달라지니 대중이 받아들이는 메시지의 해석도 달라졌다. 설국열차는 희망이고 기생충은 절망이라고.
그러나, 이런 사회구조에선 결국 너도나도 이유도 모른 채 타인을 혐오하거나 증오하다가 역할극의 인형들처럼 의미도 없이 감정도 없이 죽는다? 이런 종말론적 속삭임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좀 멈춰봐, 그렇게 죽어라 달리다 죽을 때까지 죽는 줄도 모른 채 죽어가는 거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하고 한편 조롱하면서 한편 우려하면서, 한없이 맹목적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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