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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여성혐오'의 함정

아난존 2017. 12. 7. 08:03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는 독자에게 상냥한 책은 아니다. 제목에서도 보듯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불편함을 준다. 여성 입장에서 보면 멸시를 당하는 대상 안에 내가 포함돼 있어서 불편하고, 남성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쁜 사람으로 분류당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누군들 혐오의 대상이 되고 싶을까, 동시에 내가 혐오를 생산하는 시스템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종종 알면서도 모른 척할 때가 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됨으로써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심리, 우에노 치즈코는 이 지점을 가늘고 날카로운 언어로 콕, 콕 건드린다. 나도 벗을 테니 너도 벗어, 그래야 공평하지, 이런 누드비치의 규칙이 작동되고 있는 이 책은 바닷가 입구의 표지판처럼 목차에서 독자에게 허위의식을 벗으라고 요구한다.

누드비치에서는 옷을 벗는 것이 매너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푸른 파도 넘실대는 바닷가에서 맨몸으로 모래사장을 걷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 제격이다. 그러면 소금기 섞인 바람과 햇살이 선크림 바르지 않은 투명한 살갗에 직접 닿는 느낌을 맛볼 수 있다.

 

일단은, ‘여성 혐오가 뭔데?

 

나는 여자니까 여성혐오에서 자유롭다? 그렇지 않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를 남성에게는 여성멸시’, 여성에게는 자기혐오라고 명시한다. 그러니 여자로 태어나서 여학생으로 교육받고 어머니에게 양육 받은 여성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자기혐오의 덫에 걸려 있다. 나는 엄마처럼 무식한 아줌마는 안 될 거야, 엘리트 여성이 돼서 남자랑 대등해지겠어, 나의 미모로 남자를 사로잡아야지, 나는 일과 육아 둘 다 잘할 수 있어 등등 치즈코가 말하는 여성혐오의 스펙트럼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럼 남자는 어떤가, 나는 여성을 특별히 멸시한 적 없는 남자인데 나도? 당연히 그렇다, 호색한부터 여성숭배자까지 치즈코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여성혐오자이다. 호색한은 여성을 수단삼아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남자니까, 여성숭배자는 여자를 창녀와 성녀로 분할하여 통치하는 데 앞장서는 남자니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느냐고 남자들이 항의할 법하다. 그러나 치즈코는 단언한다. 남성 집단의 연대는 여성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남자는 남자의 인정으로 남성이 되는데 그때 여자라는 전리품이 필요하다고.


살벌하지만, 설득력 있네?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라는 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건이 있다. 바로 작년((2016.5.17.)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이다. 30대 남성이 노래방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20대 여자가 들어오자 식칼로 마구 찔러 살해한 사건인데, 가해자인 남성은 먼저 들어온 6명의 남자들은 모두 그냥 보냈다. 더구나 여성들로부터 무시를 당해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피해자와는 모르는 사이”(스포츠경향 2016.5.18.)라는 가해자의 진술이 알려지면서 여성들의 공분을 샀고, 이후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 논쟁을 촉발시킨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해자가 조현병(정신분열병) 환자인데 굳이 여성혐오를 내세워 성별 싸움을 붙이는 이유가 뭐냐고 항의한 것이다. 그럴 듯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 우에노 치즈코는 뭐라고 했을까?

가해자의 정신질환도 원인이지만 약자인 여성을 공격했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여성에게 입을 다물라고 할 게 아니라 폭력적인 남성에게 그만하라고 얘기해야 한다.”(동아일보 2016.6.7.)라고 일갈한다. 왜냐하면 이런 논쟁 자체가 바로 미소지니’(misogyny, 여성혐오)”(여성신문 2016.6.9.)이기 때문이다.

 

그럼, 남자는 다 여성 혐오자야?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는 나빠, 그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러니까 남자는 다 여성 혐오자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다. 치즈코가 치밀하게 따져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여성 혐오를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 익숙해서 여성 혐오인지도 모르는 그 상태에 대해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애하고 싶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다르다면 당신은 강렬한 여성 혐오자이다. 애인이 나의 남성성을 동성인 남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대여물이라면, 아내는 나의 사회적 지위를 안정시켜 주는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에로틱한 불륜을 꿈꾸는 남자라면, 자신이 여성이라는 대여물과 소유물, 두 가지 형태를 다 취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를 비난하는 당신은 반도의 흔한 여성 혐오자이다. 여자는 무조건 예뻐야 하고 자기관리의 으뜸은 외모관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대에게 여성은 경쟁에서 취득한 상품이거나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인 것이다. 따라서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는 곁에 둘 수 없다. 나의 사회적 위치를 추락시키는 일이므로.

나의 관심이나 사랑을 거부하는 여자를 못 참는 당신은 지질한 여성 혐오자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내 욕망을 충족시켜 줘야 하는 여자에게 거부당한다는 것은 내가 돈 주고 산 물건에게 거부당하는 것과 같다. 이런 물건은 고장 난 것이니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아니면 고쳐서 써야 한다. 이쯤 되면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논리도 찾기 어렵다.

 

근데, 여자의 적은 여자라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 소모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적이므로 딱히 여자의 적이 여자가 아니라고는 말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여성들 간의 연대를 의도적으로 훼방하는 프레임이라는 데 있다. 이런 분할 통치 전략은 우에노 치즈코의 입을 빌지 않더라도 매우 효과적인 지배 방식으로 인류가 오래 전부터 애용해 왔다.

그런데 치즈코는 여자들 사이의 경쟁관계를 한 발 더 들어가서 해부한다. 요컨대 여성들은 여학교 때부터 성적 우수자와 미모 우월자가 대체로 일치하지 않다 보니 남성 세계처럼 단일한 경쟁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 세계에서 벌어지는 여성스러움에 대한 패권싸움이 남성 세계보다 더 뒤틀린 형태로 수행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된 시집살이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더 고되게 시집살이시킨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이 말이 여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 부당한 억압을 경험한 약자들 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익숙한 형태인 것이다.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방식, 이것이 아동학대나 성소수자 혐오를 설명하는 논리로 확장된다. 고로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괴롭힘 당해본 사람이 다시 자신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다는 일반론이 가능해진다.

 

혐오, 벗어날 수 있을까?

 

당신은 혐오를 좋아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누가 그렇다고 할까, 그런데 참 벗어나기 어려운 감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적대감과 배타성으로 유지되는 생존환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혐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또는 나의 부당함을 합리화하기 위한 가장 좋은 전략이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나의 지질함을 감추기 위한 가장 좋은 전략도 상대의 약점을 들춰내는 것이므로. 그러니 나의 삶이 억압받을수록 나는 혐오의 감정에 그만큼 깊이 빠질 위험 또한 높아진다고 하겠다.

그럼 우에노 치즈코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인간은 아기라는 약한 존재로 태어나 노인이라는 약한 존재로 죽음을 맞습니다. 약한 사람이 약한 그대로 존중받는 것, 그게 페미니즘입니다. 사랑은 존중하고 또 존중받는 것입니다.”(동아일보 2016.6.7.)

대답이 다소 뻔하다. 누가 이렇게 옳은 소리를 반대하겠는가, 타인을 존중하고 타자에게 존중받는 거 좋은 줄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사실 우린 너무 당연해서 말하기도 지루한 상식에 놀랍도록 취약할 때가 있다. 왜냐면 그게 진짜 상식인지, 그리고 보다 사실에 근접해 있는 것인지, 그걸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지는지, 동시에 스스로를 제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먼저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여성혐오, 이용하기 좋은데?

 

여성혐오 논쟁으로 뜬금없이 핵폭탄을 맞은 정의당은 일명 메갈 사태”(2016.7-8.)로 당원 간의 분열 끝에 분노한 당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내홍을 겪었다. 내부자 증언에 따르면, 이 사태로 3만여 명 되는 당원 중 1천여 명이 탈당했다고 한다. 실로 정의당의 입장에선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사건이었다. 대체 여성혐오가 뭐 길래 이렇게까지 파장이 컸을까.

사건의 전말을 핵심만 요약하면 이렇다.

메갈리아(여성혐오 대항 사이트) 회원들이 파는 티셔츠를 입고 사진 찍은 여성이 본인의 SNS에 그 사진을 올렸다가 거센 비난을 받았다. 문제는 그 여성이 게임회사에서 일하는데 이 사건이 발단인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분명하지 않은 채 재계약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강남역 살인사건에 이어 여성혐오 논쟁으로 번지자 평소 양성평등을 지향해 온 정의당은 이념의 차이가 고용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논평을 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 논평이 메갈리아 옹호냐 아니냐로 논점이 튀어버린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념과 고용은 별개라고 주장한 것인데, 그것도 재계약을 안 한 고용주에게 보낸 신호였는데, 뜻밖에도 이것이 다수의 남성들과 소수의 여성들에게 왜 메갈리아를 옹호하느냐는 비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후 정의당 홈피 게시판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 논리는 중요하지 않다. 내 주장이 비판받음으로써 내 감정이 상한 것에 무엇보다 분노가 터진다. 그래서 일부는 정의당이 편협한 여성주의자들의 모임인 메갈리아를 옹호했다고 탈당하고, 일부는 메갈리아랑 거리를 두려고 하는 정의당의 태도에 기회주의 정당이라고 탈당하고, 일부는 이런 사소한 논쟁 하나도 제대로 해결 못한다고 이게 진보정당이냐며 탈당하고이 와중에 지금이 탈당 타이밍인가 해서 또 탈당하고.

이렇게 장기판의 말을 엉뚱한 데로 옮긴,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다. 바로 탄핵정국의 혼돈 속에서 생뚱맞게 불거진 여성대통령 누드풍자화 국회전시사건’(2017.1.24.)이다. 기존 명화의 누드 자세를 그대로 이용한 이 풍자화는 여성혐오 논쟁으로 튀어 새누리당에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고, 비판여론에 화들짝 놀란 더민주당은 서둘러 국회 전시에 관여한 표창원 의원에게 6개월 당직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이는 박대통령 스스로 자신이 여성이라서 더 공격받는다는 앞서의 주장에 기름을 부었고, 이후 탄핵반대 세력들에게 두고두고 좋은 공격의 포인트가 되었다.


이제는, 빨갱이 자리에 여성혐오?

 

우리 사회를 분열시켜 온 대표적인 용어 빨갱이, 이 말은 종북 좌빨로 진화하면서 상대를 단칼에 베는 효과적인 공격무기용 단어로 굳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이 용어의 효용성이 점차 떨어져 가고 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줄어들고 있으며, 그간 이 단어를 앞세운 분열통치로 고통 받아 온 국민들이 더 이상 겁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빨갱이가 점유했던 자리를 여성혐오가 차지한 듯하다.

특정한 혐오 대상을 전제로 하는 기득권이 살아 있고, 오랜 시간 이런 분할통치에 익숙해져 있는 국민들이 존재하는 한, 사회적 약자를 겨냥해 혐오를 부추기는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이는 우리 안의 길 잃은 증오와 분노를 에너지로 하기에 쉽게 꺼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정말 두려운 지점이다.

우리 삶은 고되고 뭐 하나 내 뜻대로 척척 되는 게 없다. 이런 현실이 불안하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마땅히 어디에 또는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게 다 내 탓만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뭔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순간 우린 자기 자신을 황급히 돌봐야 한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가 약자에 대한 공격모드로 전환될 수 있기에 그렇다.

내가 약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정글 같은 현실에서 약자라는 꼬리표를 다는 순간 강자에게 잡아먹힐 거라는 두려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약한 부분, 그래서 악해진 지점과 마주하는 용기 없이는 약자 혐오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우에노 치즈코가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적나라하게 허위의 옷을 벗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부를 가리고 있는 옷을 입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여성혐오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