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급한 한국인답게 두괄식으로 말하자면 대통령 특별사면은 없어져야 한다. 삼권분립의 취지인 권력의 균형과 견제에도 어긋나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만인 평등에도 불합치한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임금의 은혜는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지난해 12월 30일 단행된 대통령 신년 특별사면에 ‘사면농단’이란 말도 생겼다. 이 무슨 구시대적 퇴보인가?
그런데 또 작금의 내로남불 대유행 시대를 살아가면서 드는 생각 하나, 이 현상이 우리나라 한정판이 아니라 글로벌하다는 것.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인간성과 동물성을 구분했는데, 이때의 동물성이 인간성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원초적이며,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기계성에 가깝다.
미래 현실을 다루는 영화 중 복제인간이 진짜 인간보다 더 따뜻하고, 지능형 로봇이 현실 인간보다 이타적이며 헌신적인 경우 그것이 매뉴얼대로라 해도 우린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고민하지 말라고 들뢰즈는 순수한 원형적 생존 감각을 ‘동물성’, 매뉴얼에 충실한 프로그램적 감각을 ‘기계성’이라 명명했다. 왜냐, 기존의 ‘인간성’이란 용어로 설명하면 각자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논의가 진행되지 않으므로.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21세기는 선악의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다. 정의를 독점하며 타자를 단죄하려는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나 그것이 대세가 되지 못한다. 그 사례가 지난 대선 결과이다. 최강의 포식자에게 힘을 몰아주고 그 집단에 편입해서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현상, 물론 이런 동물의 세계에도 외로운 늑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지금의 한국처럼 팽팽하게 반반인 사회에선 외로운 늑대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 주택 보유 여부 반반, 정당 지지 좌우 반반, 부먹 찍먹 반반, 짜장 짬뽕 반반, 대체로 그렇다, 프라이드 반 양념 반... 각설하고.
투표율 77.1%에서 1위와 2위가 0.73%의 차이로 당락이 갈렸던 2022년 20대 대선, 이 둘(윤석열, 이재명)을 지지한 투표율을 합치면 96.4%, 나머지 10명의 후보가 얻은 투표율이 3.6%. 이 지점이 한국형 외로운 늑대 서식지 분포다. 총 14명의 후보자 중 그나마 중도 표심에 호소하며 인지도를 높였던 2명(안철수, 김동연)이 각각 1위와 2위에 포섭되면서 이런 최강 포식자 쏠림현상은 극에 달했다.
안전한 서식지로 이동한 안철수는 현 국회의원 신분으로 여당에서 당권 도전 중이고, 김동연은 제1야당의 구성원으로 경기지사가 됐으니 이들의 외로운 늑대 탈출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이러니 누가 양극화 시대에 외로운 늑대가 되려고 할까. 다당제에 시동을 걸었던 분당파들은 돌고 돌아 주류에 합류했고, 다당제 시도 법안은 본당의 분신인 위성정당을 내세운 양당의 몰빵론에 무력화됐다.
이러한 포식자 쏠림현상 속에서 최강 포식자인 대통령의 특별사면은 승자의 전리품에 해당하므로 이때 패자는 승자의 횡포에 저항하지 못한다. 현재 한국의 보수 대 진보 진영은 약육강식을 보편진리로 생각하느냐 유유상종을 제1의 신념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나뉘는데, 둘 다 세렝게티의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란 점에선 얼핏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전자는 강자 중심으로 몰리고, 후자는 울타리 중심으로 모인다는 차이가 있다.
즉, 보수는 과거 이력에 상관없이 현시점에서 강자면 추종하고 약자면 도태되는 반면 진보는 우리 진영이면 다 내 편이고 나머지는 적이 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똑같은 ‘내로남불’이라도 보수의 ‘나’는 강자고, 진보의 ‘나’는 내 편이다. 그 결과 보수는 강자의 우산 아래 모이고, 진보는 집단의 울타리 안에 모인다. 그래서 보수 청년의 상징인 일베는 경쟁 자체를 공정이라 생각하고, 진보 여성의 상징인 페미는 내 편을 정의라고 여긴다.
정리하면, 현재 한국형 보수냐 진보냐의 분류 기준은 ‘약육강식’을 보편진리로 수용하느냐 ‘유유상종’을 제1의 신념으로 지향하느냐이다. 이 범주에서 보자면, 보수의 장점은 유연함이고 단점은 무한 경쟁이 초래하는 부작용이다. 반면 진보의 장점은 울타리 내에선 단결력이고 단점은 울타리 밖에는 경쟁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2022년 12월 30일 사면농단이 국민적 관심도 지탄도 그다지 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전리품 처리방식을 승자의 권한이라고 보는 약육강식 논리가 내 편 아니면 다 적이라고 보는 유유상종 논리보다 약간 더 우세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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