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이 된다는 것

실존주의와 자살, 죽음을 의지해도 될까?

아난존 2021. 6. 27. 22:00

 

인천대교에 차를 두고 20대 공무원이 사라졌다고 한다. 아직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수색 중이나 차 안에서 유서가 발견됐단다. 이 사건 전에는 네이버에 다니는 40대 가장이 직장 내 괴롭힘을 못 이겨 자살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우리나라 자살률 높은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연령대도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고르게 자살률이 높다. 왜 그럴까?

 

실존주의는 학자에 따라 스펙트럼이 넓지만 느슨하게 묶으면 개인의 선택과 의지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살을 해선 안 된다, 그렇게 실존주의적으로 말할 순 없다. 내 생명은 온전히 내 것인데 누구 뭐라 할 수 있을까. 다만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자기 안의 신과 소통을 좀 해야 할 것이고,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맹목적인 생존본능을 포기할 만한 설득력이 좀 필요할 것이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 그게 실존주의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아니다. 바로 이곳에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선택 조건일 뿐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우리 한국인들의 자살이. 자살을 미화할 생각도 폄훼할 생각도 없지만 우리의 높은 자살률이 가리키는 방향, 그건 실존적 죽음이라 할 수 없기에 그렇다.

 

실존주의의 핵심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별 자아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요구받는 역할에 충실한 것은 실존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주변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굴절시키고 왜곡하는 것도 실존주의자의 선택지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삶을 충분히 자신의 의지대로 살다가 그리고 나서 죽음도 기꺼이 선택한 것인지.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자살은 태반이 자신의 주변과 상황이 얽혀서이다. 정치인의 경우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키고자, 그리고 지지자들의 비난을 견딜 수 없기에. 정적의 공작으로 자살을 당할 순 있어도 반대편의 비난이 무서워 자살하진 않는다. 반대편의 공세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정치인이 자살했다면 그건 자신의 편을 설득할 자신이 없을 때이다.

 

마찬가지다. 성실하게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고 대기업 직원이 된 사람들의 자살은 자신의 주변, 특히 가족이나 친구 같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자신을 감추고 살아서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도 참기만 한다. 그러니까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을 괴롭히는 그 상대에게 있지 않고, 자신을 부러워하는 주변이나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가족에게 있다는 것. 그러므로 왜 억울하게 피해자가 자살해? 가해자를 죽이고 죽지! 그런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살의 가장 큰 이유가 괴롭힘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우리의 높은 자살률이 실존적 자살 때문이라면 그래도 이해하고 싶다. 우리의 교육열이 세계 1위인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서 세상과 타협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의 머리가 너무 좋아서 부조리한 현실을 예민하게 느끼기에 그런 섬세한 감수성을 갖고는 도저히 진흙탕 속에서 짐승처럼 뒹구는 게 혐오스러울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좋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실존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실존적이지 않아서다. 타인을 지옥이라고 한 사르트르도 인간의 자유를 저주라고 할 만큼 의지적 선택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선택하면 책임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감이니 우리처럼 소속감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어려운 일인 건 맞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은 개인의 의지적 선택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밀려난 사회적 타살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