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인간

그 많은 마르타들은 이제 없는가?

아난존 2021. 6. 15. 19:02

 

예수님이 대중 설교가로 한창 인기가 좋았던 때 마르타도 예수님의 열혈팬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모셨다. 그것은 팬으로서의 영광이며 기쁨이니까. 그런데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돕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거 아닌가.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이야 마르타도 마리아 못지않았다. 하지만 귀한 손님을 초대했으니 대접을 잘하고 싶었다. 그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이건 불공평해,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마리아더러 자신을 도우라고 말씀해 달라 청했다. 그러자 예수님한테서 돌아온 대답,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이때 마르타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정일은 응당 여성이 해야 한다고 자라면서 보고 배웠으나 그녀 역시 보통 사람인지라, 왜 나만 온갖 시중을 드느라 바쁜 거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건 난데 그 혜택은 동생이 받는구나, 집주인이 손님의 시중을 드는 건 당연한데 나더러 걱정이 많다고, 그럼 나도 굳이 혼자서 이리저리 분주할 필요 없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마르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스카 축제 엿새 전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사는 마을인 베타니아로 다시 오셨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는 바로 마르타의 오빠였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여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이번에도 시중을 들었다. 이 와중에 동생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다(요한 12,1-3). 이날 마르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체 왜 매번 주연은 동생이고 나는 조연일까, 마르타가 그렇게 생각했단 말은 성서에 없지만, 그녀가 자신만 시중을 드는 것에 불만을 느꼈던 인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충분히 가졌음 직한 생각이다. 마르타는 당대 여성들의 평균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과감하게 시중드는 일을 중단하고 자신도 예수님의 식탁에 끼어 함께 식사할 만큼 강단 있지 않았다. 또한 어린 여동생보단 힘센 오빠가 손님들을 시중드는 일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할 만큼 시대를 앞선 여성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중드는 일 따위 각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둘 만큼 배짱이 있지도 않았다. ? 마르타는 2,000년 전 여성이니까.

 

그럼 2,000년 후의 여성들은 많이 달라졌을까?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우리 엄만 닭 목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본심이 아니었다. 그렇게 참고 배려하다 보니 가족들이 알아서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으면 억울해진다. 그래서 예전 어머니들은 자신의 헌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셨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으면 언니를 돕는 대신 앉아서 듣고, 비싼 향유로 발을 씻어드리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여성도 인간인데 뭐가 다를까.

 

그래서 지금의 여성들은 아들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딸에게 공부를 강요해본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히 성에 차진 않는다. 어차피 자식도 나는 아니니까, 대리만족이란 게 그 끝이 있고 한계가 있는 이상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상할 때가 많다. 그런 눅진 마음이 마르타가 그랬듯이, 마리아도 시중드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21세기 첨단 사회를 살면서도 영혼이 첨단화되는 건 어려운 일이어서 그럴까?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시중들지 않고도 3,000명을 먹이고 5,000명을 먹이셨다. 물론 우리가 그런 기적을 베풀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나의 고단함을 나와 같은 여성에게 지우려는 마음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필요한 건 내가 나의 고단함에서 벗어나는 거지, 남을 나와 같은 고단함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니까.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흘러간 옛말 따위 상관 말고, 교회 여성들은 마르타의 함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에 당당한 마리아와 연대하자. 그래서 본인이 원한다면 식탁에서 예수님과 음식을 나눠 먹자. 시중드는 사람이 없으면 어떤가, 정 시중드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가장 큰 은혜를 입은 라자로를 시키면 될 일이다. 오빠 라자로는 죽은 목숨도 살려 받았는데 그깟 시중드는 일이 대수일까. 예수님과의 만찬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도 아닌데 자신이 가장 원하는 역할을 하는 거, 그 정도는 오늘날의 여성들이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