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래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자신의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자고 아브람에게 제안했고 아브람은 이를 수용한다. 그리고 아브람의 나이 팔십 육세에 하갈이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을 얻는다(16,16). 이때까지 아브람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자손이 반드시 사래를 통해 나온다고 생각지 않았다. 사래는 자신이 직접 하느님의 언약을 받지 않았으니 둘 다 하느님을 불신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하느님의 백성 만들기 계획이 사래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하갈을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으며 오로지 아브람의 자손이란 것만 알 수 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 다시 하느님이 나타나시어 사래를 통해 자손을 얻는다고 말씀하실 때 아브람은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하고 중얼거렸다(17,17). 이후 손님의 모습으로 야훼가 나타나 사라의 출산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예고할 때도 이를 엿듣던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18,12). 더욱이 사라가 이미 오래전에 달거리가 끊겼다는 설명이 이 둘의 불신에 무게를 더해준다(18,11).
그러나 야훼는 이스마엘의 탄생 후에도 여전히 많은 민족의 어머니, 즉 그 민족들을 다스릴 왕손의 조상으로 사라를 선택하셨고, 사라의 자식인 이삭과 이삭의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고 언약하신다(17,15-19). 사라가 야훼의 약속을 믿거나 말거나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사래는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아브람의 아내로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 권리를 누렸다. 사래 역시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의 딸로서 사래는 아브람의 아내이자 동시에 배다른 남매였기에 부족 안에서의 권리가 동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하갈에게 야훼 하느님은 어떤 존재일까? 하갈은 이집트인, 즉 가나안에서는 이방인이며 사라의 몸종 신분이다. 따라서 이중의 억압 아래 있는 약자로서 임신을 계기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엿보지만 실패한다. 그리고는 박대하는 사래를 피해 도망치는데, 이런 하갈의 행동은 의지할 데 없는 여성치고는 무척 대담한 것이다. 더구나 그때까지 하갈에게 야훼는 남의 하느님일 뿐이었다.
그런 하갈에게 야훼의 천사가 나타나 사래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래서 하갈은 자신에게 말씀해 주시는 야훼를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라고 불렀다(16,13). 이렇게 하갈은 야훼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사래가 남편과 부족의 보호 아래 그 연장선에서 야훼와 관계를 맺었다면 하갈은 후견인 없는 단독자로서 아무런 보호 없이 야훼와 관계를 맺었다. 이때 하갈에게 야훼는 사라에게 했던 축복과 동일한 내용으로 약속하신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16,10).
이스마엘의 탄생은 사래의 초조함이 낳은 결과이다. 따라서 이스마엘에 대한 책임을 사래가 지는 것이 당연한데도 이삭을 낳게 된 사라는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아 주십시오.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21,10)라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곧바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하갈은 소리 내어 우는 이스마엘을 주저앉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때 하느님은 천사를 시켜 하갈을 위로하시고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이 보이게 하셨다(21,16-19).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러나 사실은 이스마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갈에게 먼저 약속하신 대로 이스마엘을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 이행은 자신의 원래 계획에서 멀어져 인류가 긴 시간을 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렇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선택의 의지를 부여하는 것으로 피조물의 위치를 격상시키신다.
이후 이스마엘은 바란 사막에서 살았는데 그는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었고, 하갈은 자신의 고향인 이집트 땅에서 며느리감을 골라 이스마엘의 아내로 맞아들였다(21,20-21). 그리고 아브라함의 장례를 이삭과 이스마엘이 같이 치른 것으로 보아 형제간의 교류가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했던 축복을 언약대로 이삭에게 내려 주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수인 이스마엘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이스마엘에게 내린 축복은 하갈에게 약속하신 거라는 데 차이가 있다. 물론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핏줄이어서 내치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큰 민족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크투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 이는 하갈이 갖는 구약에서의 중요성을 새삼 의식하게 만든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우유부단도 사라의 불신도 하갈의 투기도 모두 탓하지 않으셨다. 사라에게는 처음 계획대로 많은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하갈에게는 변경된 계획이지만 많은 자손을 보게 하셨다. 이를 통해 이방인이라도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실수까지도 자신의 역사로 끌어안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갈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 하느님이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곤궁함이다. 인간들이 스스로 정의로워서 아무 문제 없이 지상낙원을 이 지구상에 건설했다면 아마도 우린 하느님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분가해서 잘 사는 자녀를 더이상 부모가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 인간은 불행히도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천만다행히도 우리 하느님은 우리의 곤궁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곤궁함에 항상 응답하신다.
'종교와 인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 신학, 하느님 어머니? (0) | 2021.02.16 |
---|---|
들릴라(데릴라), 신전 창녀 또는 여사제? (0) | 2020.10.15 |
여성의 육체, 그 더러움의 정체 (0) | 2020.10.10 |
종교 웹툰, 인간의 온도/ 압락사스/ 하르모니아 (0) | 2020.10.07 |
비대면 접촉은 신앙의 진화 과정 (0) | 2020.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