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인간

비대면 접촉은 신앙의 진화 과정

아난존 2020. 8. 19. 20:28

 

코로나19가 불러온 가장 난감한 문제는 대면접촉 불가, 즉 사람끼리 현장에서 직접 만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 종교 중 특히 개신교가 이런 팬데믹 상황에서 문제를 자꾸 일으키는 이유도 그간 개신교는 잦은 모임을 통해 교류하고, 그때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생소한, 예배 후 식사라는 게 개신교에는 존재한다. 1인 가구가 폭증하고 홀로 독야청청한 인간들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어쩌면 그런 전통은 충분히 미덕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모임과 식사라는 측면만 놓고 보자면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터넷 강국에서 산다 해도 비대면 접촉이 갖는 한계는 분명 있다. 체온이 전달되지 않는 교류에 익숙지 않은 탓도 있고, 단체별 개인별 장비와 기술 습득의 차이도 있다. 특히나 종교처럼 오래된 관행을 아름다운 전통이라 여기는 집단에선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 자체가 공포고 스트레스다. 자고로 변화와 혁신이란 내부적 각성이 아니라 외부적 압력에 의해 진행되는 법, 이게 진화의 핵심이고 발생 조건이다.

 

그럼 제도종교가 진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퇴행이냐 고립이냐 퇴행으로 인한 고립이냐, 선택은 별로 없어 보인다. 더욱이 한국종교는 기복신앙의 토대 위에서 세속적 욕망을 배경으로 부흥한 만큼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권장하는 게 비대면 접촉, 곧 온라인 활용이다. 온라인 예배, 온라인 만남 등.

 

천주교는 평화방송이 중계 미사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리만치 천주교는 가톨릭의 특성상 절대 버리지 못할 것 같았던 성체성사를 아주 쉽게 포기했다. 미사의 꽃이자 고갱이로 여겨 온 성체성사가 기도문 낭독인 신령성체(신영성체)로 대체되어도 미사의 본질, 천주교의 정체성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천주교의 절차적 형식을 중시하는 태도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진화 과정을 겪은 것이다.

 

그동안 제도종교는 내적 성숙 없이 외적 성장에 치중했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에도 비종교인들은 개신교 목사는 자영업자, 천주교 신부는 공무원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니 개신교가 팬데믹 상황에서 훨씬 더 힘들 수밖에 없다고 동정하는 사람들, 공무원이 뭔 걱정이냐고, 먹고 사는 문제에 장사 없다고 종교를 철저히 세속의 영역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거 종교인들은 알까, 자신들을 바라보는 비종교인들의 시선을 모르니 지금도 여전히 신자 숫자 감소, 기부나 후원 축소 같은 문제에만 매달린다.

 

제도종교의 위기가 곧 종교성의 위축도 아니고, 종교의 변화가 곧 신앙의 변질도 아니다. 지금 코로나가 드러낸 건 현재 존재하는 제도종교의 폐해에 불과하다. 중세를 마감시킨 흑사병은 구교인 가톨릭을 종말로 몰아넣었지만 이후 신교인 개신교 부흥의 토대가 되었다. 온 우주가 진화의 과정에 있는데 종교라고 예외일까, 종교 자체는 망하지 않는다. 다만 진화를 거쳐 시대에 적응하는 종교가 살아남을 뿐이다. 인간의 기본속성 중에는 여전히 종교성이 있으며 그것이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특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