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이면을 보라고, 그렇게 15년간 나에게 간헐적으로 충고해준 지인에게 최근 느낀 생각, 그러니까 그간 나의 눈치 없음에 짜증이 났던 거였구나, 나에 대한 염려가 아니었고 애정은 더욱 아니었고, 그 사람이 나에게 ‘친구’라고 부르는 이면에는,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 그런 속뜻이 있었구나, 그러니 그의 이익에 반하면 우리 관계는 언제든 끊어질 거였구나, 그가 사용하는 ‘친구’라는 용어가 적어도 나하고의 관계에선 그랬구나, 하는 걸 알았으니, 드디어 나도 이제 사람들이 하는 말의 ‘이면’을 깨닫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는 핀란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대학진학률을 가진 나라다. 핀란드가 무상교육이란 걸 고려하면, 우리의 교육열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쉬운 글자인 한글 덕분에 문맹률도 엄청 낮고, 20대의 독해력은 OECD 가입국 중 최상위권이다. 그런데 연령대가 높을수록 독해력이 떨어져서 40대 이상 독해력은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이고, 그래서 청년층과 중장년층 이상의 독해력 차이가 가장 큰 나라라고, 이게 한 3년 전쯤 기사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포털의 댓글에는, 난독증이냐, 제목만 보고 댓글 달았구나, 같은 유형의 반응이 아주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물론 난독증은 글자의 조어 자체가 잘 안 되는 증상이니, 독해력이 없다는 지적에 적합한 말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난독증’은 글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특정 단어에 꽂혀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정도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각자 자기식으로 해석하다 보니 정작 독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면’에 대해 의심한다. 왜냐면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는 마음을 본인인들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나마 말이나 글로 쏟아놓으면 무형의 감정이 유형의 의미를 갖게 되지만, 본인도 감추려는 그 의도를 어떻게 타인이 정확히 알 수 있을까, 궁예의 관심법이 우리 모두의 국민성이 되어도 좋을까, 그래 봐야 그 이면이라는 게, 상대는 나를 사용가치로 보는 거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상품이잖아, 자본주의 몰라? 상품가치가 존재가치를 대체한다고, 그걸 인정하는 것, 사실 그게 전부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칭찬을 질시로 번역하는 거, 나의 불행은 타인을 안심시키고 나의 행복은 타인을 위협한다고 전제하는 거, 그래서 슬픔은 연대를 강화하고 기쁨은 나눌 수 없다는 거, 그걸 수용하는 것, 사실 그게 그 이면이라는 것의 거의 전부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통찰력인가.
왜 우리는 나이 들수록 독해력이 떨어지는가, 그거야말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우리의 자화상 아닐까, 타인에게 지치고 사회에서 배제될수록 시야가 좁아지고 볼 수 있는 색깔이 적어지는 거,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치가 높아져서 그만큼 사고가 깊어져야 하는데, 그랬을 때 제대로 문맥과 의도가 파악되는 건데, 실상은 신체 나이보다 마음의 나이가 더 빨리 늙어서 영혼의 치매를 스스로 부르고 있는 거, 우리가 진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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