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은 주체에 의한 인식 영역이고, 객관은 주체를 제외한 모든 대상에 대한 인식 영역이다.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 없어지면 이 세상도 사라지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관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철학사에서는 실존주의 계열인 거고, 공자처럼 현실적인 사람도 여기에 가깝다. 반면 ‘나’란 인식의 주체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상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고대 플라톤부터 해서 서구 철학사의 주류를 이뤄왔다. 동양의 자연 섭리를 중시하는 쪽도 주체보다는 대상 중심의 사유라고 하겠다. 내가 죽어도 지구는 돌고 봄은 올 것이며, 인류가 한꺼번에 멸종한다 해도 지구의 운명은 인간과 다르게 움직일 것이므로.
여기서 중요한 점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은 가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즉, 나의 가치가 우선이냐 다수의 가치가 우선이냐 하는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색깔’처럼 우리의 감각을 통과해서 얻은 지식마저 그것이 100%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구체적인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경험론의 한계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경험은 오감이라는 인간의 인식체계를 지배하는 작동원리지만, 그 작동원리가 모든 사람이 동일할 거라는 기대는 착각이다. 가짜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플라시보 효과는 객관주의를 믿음의 영역으로 넘겨 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영하 30도에서는 누구나 춥다. 그러므로 객관적 사실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0도에서 물이 어는 것처럼 인간은 동일한 온도에서 동일한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하의 온도’라는 객관적 사실과 ‘춥다’라는 주관적 인식 사이에 무수히 많은 개별 주체 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경험이 객관적이라는 인식의 오류를 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여기서 경험을 통한 인식은 각 개인에게 지식과 정보로 전달되고 입력되어 이후 인식을 거친 경험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과 같다.
정리하면, 인식의 주체를 ‘나’에 한정하면 나의 경험보다 우선하는 인식이란 없다. 그러나 ‘나’조차도 인식의 대상이라면 내 경험 이전의 태초부터 이어져 내려온 사유들, 내가 모르는 유전자의 기억들, 소위 운명과 팔자 같은, 선천적이라고 해서 나를 굴복시키는 그 모든 강력한 힘이 경험 이전의 세계라고 할 것이다. 과학의 발달과 실증주의에 대한 합의로 오늘날 21세기의 우리는 주체인 ‘나’의 경험 없이는 인식도 없다는 것이 통념이나, 근대적 사유에 지친 현대인들은 포스트모던이라 하여 이런 사유체계에 의심을 던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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