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이 된다는 것

한국인은 진짜 남 잘되는 꼴을 못 볼까?

아난존 2021. 2. 2. 18:07

 

자신을 중심으로 동심원적 사고를 하는 거, 인간이라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유혹이다. 데카르트가 그러지 않았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이를 확장해보면 내 생각이 미치는 영역, 그러니까 내 인식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들하고만 나는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건 인간에겐 너무 당연한 존재론적 조건이다.

 

어쨌든 생각하는 나 없이 나의 존재를 무엇으로 증명할까, 다만 문제는 내가 주체라는 당위성과 나의 가치라는 목적성이 같은 거로 인식되면서 생기는 이 죽일 놈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과 내 가치가 타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다른 얘긴데 우린 이걸 분리해내지 못한다. 내 감기가 남의 암보다 힘든 게 인간이니까.

 

그러니 문제는 동심원적 사고가 아니다. 동심원 사이 거리의 균일함! 이게 너무 자의적이라는 거다. 동심원 사이의 거리에 규칙성이 없으니 예측이 안 된다. 예측 불가능하니 분석이 안 되고, 분석 불가능하니 소통 포기다. 이제 남은 건 기준 없이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일베가 이 시대의 상징어가 된 마당에도 각계각층은 반성보단 나의 동심원을 지키느라 곳곳에서 사생결단의 전투가 한창이다.

 

이근 대위의 추락을 알리는 기사 댓글 중에는, 한국인은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 이런 종류의 댓글들이 있었다. 새삼스러울 거 하나 없는 반응이긴 하다. 내용과 상관없이 어디에다 붙여놔도 그럴듯하고, 살면서 한 번쯤은 직접 겪거나 간접으로라도 봄 직하다. 또는 내가 누군가의 잘됨을 배 아파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한국인만의 특징일까, 아니면 유독 한국인이 더 그렇다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높은 교육열을 보라, 확실히 종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도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다른 나라도 억울한 사람 천지삐까리다. 다른 나라라고 평등사회에 인류애가 철철 넘칠까, 그럴 리 없다는 걸 누구는 유전적으로, 누구는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야 마는 게 세상사고 인간사다.

 

그럼 왜 우린 스스로 한국인들에 대해 비하적 사고를 하게 됐을까. 이걸 역으로 생각하면 한국인들은 평등의식이 유난히 높다는 얘기다. 단일민족의 신화 아래 인종적 민족적 차별을 내부적으로 겪지 않았고, 일제강점기와 외세에 의한 해방이란 격한 역사를 통해 신분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기회주의와 처세술이 동급이 되는 상황들, 우리의 비틀린 심사에는 기회주의를 처세로 미화하는 부류에 대한 혐오와 부러움이 공존한다.

 

남을 짓밟아야 경쟁에서 이긴다는 이 불온한 경쟁관은 다수의 삶을 죽음에 이르도록 피폐하게 하는데, 이런 경쟁의식은 역설적이게도 신분이 뒤집히는 경험들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거, 그래서 수저론에 절망하고 갑질에 분노한다. 내가 너보다 못한 게 없는데, 대충 포기하고 대충 눈감고 대충 잊으며 살지 않기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아이러니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사회가 암암리에 인정하기에 연고주의에 목을 맨다. 연고주의에 목을 매면서도 불공정에 분노한다. 여기서 내로남불이 나오지만 그걸 인지하지 못한다. 연고주의가 나의 동심원이면 그것이 불공정이란 생각을 못 하기에. 그러나 남의 동심원이고 내가 그 동심원 밖이라면 언제든 분노는 폭발 직전 상태, 살짝만 건드려도 대폭발, 그래서 분노조절장애가 개인을 넘어 사회문제인 문제적 사회.

 

그러니까 한국인은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종특이 그런, 원래 시기심 많은 민족이 아니다. 기회주의가 처세로 둔갑하는 역사를 거쳐, 과정보단 결과가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집단 트라우마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기꾼이 많은 만큼 사기 쳐서 성공하는 사람도 치 떨리게 싫어한다. 그래서 재벌을 부러워하면서도 혐오한다.

 

성공적인 결과를 동경하면서도 불공정한 과정은 혐오하는 이 이중성, 평등과 공정에 대한 정의감은 있지만 나의 동심원과 남의 동심원은 다르다. 남이 하면 기회주의인 것도 내가 하면 처세니까. 그래서 기회주의가 위험사회를 만들어도 나의 울타리는 안전할 거라고 믿는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 안전망이 뻥뻥 뚫리는데도 그걸 인정하기엔 내가 지나온 시간이 부정되고 나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 같아서 외면한다.

 

그래서 우린 더 괴롭게 산다.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결과만 좋으면 과정 까짓거 덮어버리는 그런 몰염치함이 없기에, 일부 기득권처럼 제국주의적 사고가 정의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뻔뻔함이 없기에, 평등의식은 높고, 그래서 교육열은 과하고, 그런데 경쟁은 불공정하고, 그래서 화나고 죽을 만큼 힘들어도, 그래도 공정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는 자의식 만땅인 민족, 그래서 우린 이제 국뽕으로 진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