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4일은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상징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날이다.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고 66일, 취임한 지 35일 만에 조국 장관이 전격 사퇴를 발표한 뒤 당일 사표가 수리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가수 설리의 사망 소식이 그 사이 기사로 나왔다. 만우절에 홍콩 배우 장국영의 사망 기사가 떴을 때처럼 이 모든 사건이 다 현실감이 없었다.
다음 포털의 실시간 이슈 검색어 순위에 ‘조국 사퇴’와 ‘설리 사망’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걸 보면서 엘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떨어졌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서민들이 넘보지 못하는 위치였던 그들, 그중 하나는 지난 두 달여 간 온 가족이 대중에게 갈갈이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보였고, 그중 하나는 꽤 긴 시간을 대중의 악플에 시달리며 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등을 앓아왔다고 한다.
물론 우리 사회 전 구성원 모두가 가해자는 아니다. 지난주 설문 조사만 해도 40% 넘는 지지자가 조국을 응원했고, 설리의 악플러들은 뭐 몇 %인지 따질 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니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통틀어 인간은 어쩌고 하면서 죄다 나쁜 놈 만들 필요야 없는 것이다. …그런 건데, 그게 맞는 건데 왜 자꾸 절망하게 되는 것일까?
나의 경우는 그렇다, 귓속에서 울려대는 혐오의 표현들이 아는 이들의 목소리로 들려온다는 것, 그것이 나를 우울하고 소심하게 좌절시킨다. 거봐 내가 그랬잖아, 인간이 원래 그래 질투야 질투, 유명인은 기득권 아냐? 그러니 잘난 척하지 말았어야지…, 그래 그런 것이다! 잘난 척이야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 것이다! 대놓고 불법을 저지르고 죄의식 없이 갑질을 해대는 것보다 더 파렴치하다고 치를 떠는 그넘의 잘난 척이란 게 뭐길래, 이 괘씸죄에 걸리면 소위 대중의 일부는 작정하고 혐오하며 자신의 사사로운 원한까지 한껏 실어 대상자가 죽을 때까지 밟고 또 짓밟는다.
입바른 소리가 부른 비극, 조국도 설리도 하고 싶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일까? 그게 그렇게나 거슬렸던 것일까? 둘 다 너무 밝고 좋은 세상에 있었다는 거, 주변의 사랑을 받으며 당당했다는 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자기 세계에 충실했다는 거, 그게 어떤 이들에겐 그토록 용서가 안 되는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럼 어쩌지? 잘난 사람이 잘난 척하는 꼴도 못 봐주는 세상에서, 잘나지도 못한 사람이 무슨 수로 전염성 강하고 처방전도 없는 혐오의 바이러스를 막을까만은, 이런 자괴감이 학습된 자기비하라는 거, 이런 좌절감이 혐오를 전염시키는 어떤 이들에 의해 체험된 자기학대라는 거,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구조가 강요하는 절망감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아닐까 한다.
엘리스도 처음엔 이상한 나라가 낯설어서 두렵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그 친구들과 함께 시련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성장해냈다는 거, 그대로 주저앉아 포기하는 대신 앞으로 나아갔고 어디로든 움직였기에 기필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거, 지금의 '나'와 그리고 어떤 '우리'들, 적어도 혐오의 바이러스가 자신을 좀먹는 것에 저항하는 그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안내도이다.
'소통과 관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면체의 세상과 불통의 바벨탑 (0) | 2019.12.16 |
---|---|
가짜뉴스가 말하는 인간계 (0) | 2019.11.20 |
민주주의가 역겨운 보수와 힘겨운 중도 (0) | 2019.10.12 |
'가짜왕' 제도의 한국판 속죄양 '조국' (0) | 2019.09.24 |
언론과 검찰과 ‘조국’, 무명의 일개 김 선생의 죽음 (0) | 2019.09.19 |